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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앞세워 나랏돈 360억 뜯었다… ‘빌라왕’ 진화판 이 수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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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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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껴야 팔리죠” 집주인부터 홀렸다

2021년 5월께 서울 관악구의 빌라 한 채를 처분하려던 A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3억5000만원에 빌라를 내놨는데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다. 그때 광고 전단 한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컨설팅’을 통해 장기간 팔리지 않는 매물에 투자자를 유치하고 보다 높은 가격에 처분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광고를 낸 쪽과 접촉하자 “전세를 놔 세입자를 먼저 들인 뒤 매매하는 방식으로 가능하다. 진행비 등이 들어가긴 하지만 비싼 값에 매물을 처분해줄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의구심도 들었지만, A씨는 이들에게 일을 맡겨보기로 했다. 곧 세입자인 B씨가 본래 매매가보다 훨씬 높은 4억3700만원에 전세 들더니 불과 한 달여 만에 같은 가격으로 집을 사들이겠다는 C씨까지 나타났다. A씨는 집을 처분하긴 했지만 찜찜했다. 매매 계약 과정에서 A씨는 매수인 C씨로부터 돈을 한푼도 받지 않았다. 다만 계약서상에 ‘세입자 B씨에 대한 전세보증금 4억3700만원 지급 의무를 매수인 C씨가 승계한다’는 포괄적 승계 내용이 포함됐다.

이로써 A씨에게는 세입자 B씨에 대한 전세보증금 반환 의무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그는 골머리 앓던 빌라를 4억3700만원에 처분한 게 됐다. A씨는 일을 처리해준 이들에게 수수료 명목으로 8700만원을 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문제가 터졌다. 새로 바뀐 집주인 C씨는 전세보증금을 반환해줄 능력이 없는 노숙인이었다.

150채 360억 털어낸 ‘빌라왕’ 진화판

이와 같은 수법으로 수도권 일대 세입자들을 등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경찰청 강력범죄수사대는 서울과 경기 등지 소재 빌라 153채 세입자를 속여 수백억원대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113명을 붙잡아 이 가운데 총책과 모집책 등 5명을 구속했다고 31일 밝혔다. 피해 액수는 361억원에 달한다.

이들은 온라인 부동산 플랫폼 등에 올라온 매물 정보를 통해 장기간 빌라를 처분하지 못한 소유주에게 접근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A씨 사례와 마찬가지로 “전세를 낀 상태로 진행해야 매물을 처분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범행의 핵심은 매매 계약 체결 과정에서 노숙인·신용불량자 등을 섭외해 이들을 매수인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보증금 반환 능력이 없는 사실상의 금치산자들로, 이들은 수억원대 전세보증금 반환 의무가 있는 빌라를 떠안는 역할을 했다. 경찰은 이와 같은 수법으로 일당이 빌라 소유주들로부터 1건당 1000만원~8700만원의 수수료를 받아 챙긴 것으로 파악했다. 빌라를 떠안은 노숙인과 이들을 섭외한 다른 일당에게는 1건당 약 2000만원의 ‘진행비’ 등이 지급됐다.

이번 범행이 이뤄진 구조는 이른바 ‘빌라왕’ 사건과 비슷하지만, 매수인으로 노숙인을 내세워 범행을 저지른 이들의 신상이 등기부등본 등에도 드러나지 않아 추적이 더 어려웠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개인은 구제됐지만, 나랏돈 털렸다

경찰은 피해자 가운데 120여명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돼 피해를 변제받을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일당은 전세를 놓는 과정에서 보증금 액수를 공시지가의 150% 수준까지 높였는데, 이는 HUG 전세보증금반환보증 최고 보장 한도에 해당한다. 이처럼 전세보증금 반환에 문제가 생기면 HUG는 전후 사실을 확인한 뒤 보험에 가입한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변제해준다.

문제는 그 이후 절차다. 세입자 전세보증금을 반환해준 HUG는 본래 보증금 반환 의무를 지닌 이들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한다. 하지만 책임을 떠안고 있는 것은 노숙인 등이어서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경우 HUG는 해당 물건을 경매에 내놔 보증금을 거둬들이지만 회수할 수 있는 금액 비율은 실제 지급액의 70~80%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시세보다 높은 전세 물건에 은행 이자와 부동산중개료·이사비용 등을 지원해준다는 경우가 있다면 비슷한 유형의 사기 범죄를 의심해야 한다”며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세입자도 많아 피해 규모가 더욱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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