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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지금 재정 긴축할 땐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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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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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시장 불안이 실물경제로 옮겨붙었다. 지난해 4분기에 이어 올해도 역성장이 우려된다. 역성장은 딱 세 차례 있었다. 1980년(-1.7%, 2차 오일쇼크)과 98년(-5.5%, 외환위기), 2020년(-0.7%, 코로나). 2009년(0.7%) 금융위기 때도 역성장은 아니었다. 올해 그만큼 심각하다는 얘기다. 최근 금융시장이 안정을 찾자 ‘별거 아니네’라는 분석이 나온다. 주가를 띄우려고 부추기는 전문가가 많다.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실물경제가 어려워지면 금융시장으로 다시 번지는 건 시간문제다. 외환위기 때 기업과 금융회사가 동반 추락한 기억이 생생하다. 30대 그룹 중 11개가 문을 닫았다. 5대 시중은행(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이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의 경기부양 카드는 두 가지다. 금리를 내리는 통화정책과 재정을 푸는 재정정책. 둘 다 여의치 않은 게 문제다. 금리를 내리기 어렵다. 물가 상승세가 둔화됐지만, 여전히 5%대로 높다. 2~3%로 안정될 때까지 현 기준금리(3.5%)를 이어가거나 좀 더 올려야 한다. 금융당국이 창구지도를 통해 시장금리를 누르고 있으나 임시방편이다. 정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

미국도 금리 인상 속도를 늦추는 것이지 인하하는 건 아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상승률은 6.5%. 연준(Fed) 목표인 2%는 한참 멀었다.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면 순진한 생각이다. 79~81년 연준이 기준금리를 11.5%에서 21.5%로 급격하게 올리고도 물가가 2%대 안정을 찾기까지 2년이 더 걸렸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인플레이션이 1~2년 후 진정되더라도 금리가 예전 수준으로 돌아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금리 못 내리면 남는 부양책은 재정
‘보수=작은 정부’에 얽매여선 안 돼
문재인 정부처럼 마구 쓰지 말고
선별적, 한시적, 적기에 쓰면 효과

재정정책도 쉽지 않다. 문재인 정부 때 재정을 축내는 바람에 여력이 없다. 재정을 풀다가 물가를 자극할 우려도 있다. 미묘한 걸림돌이 하나 더 있다. ‘보수=작은 정부, 진보=큰 정부’ 프레임이다. 보수는 재정정책을 쓰지 말고, 긴축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으로 읽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미국 민주당은 공화당보다 좌파이지만, 북유럽과 비교하면 우파다. ‘나는 보수이니 긴축에 찬성’ ‘나는 진보이니 재정확대’ 식의 논리는 단순할 뿐만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과거 사례를 봐도 이 프레임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민주당 지미 카터 정부(77~80년)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2.3%였다.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81~88년)의 재정적자는 4.1%로 오히려 증가했다. 민주당 빌 클린턴(93~2000년) 때 줄었다가 공화당 조지 W 부시(2001~2008년) 때 다시 늘었다. 통념과는 반대다. 국내에서도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부 10년간 GDP 대비 정부 규모는 더 커졌다. 정부 크기를 좌우하는 광의의 조세부담률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23.7%에서 2017년 25.4%로 증가했다(전주성 『재정전쟁』).

내로라하는 석학들도 이념 프레임에 빠진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중도좌파다. 재정 확대를 주창하는 케인스 학파다. 정치색이 짙다. 민주당을 지지한다. 바이든 정부가 2021년 초 코로나 펜데믹 극복을 위해 1조9000억 달러의 부양책을 내놓았다. 크루그먼은 “인플레이션을 촉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바이든 편을 들었다.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이 닥치자 크루그먼은 “매우 잘못된 예측이었다”고 반성했다. ‘진보=큰 정부’에 갇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실수였다.

그런 면에서 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가 한 수 위다. 그도 민주당 경제통이지만, 재정을 무조건 늘리는 데 반대했다. 서머스는 “1조9000억 달러는 너무 많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것”이라고 우려했다. 금융위기 당시 정부가 쏟아부은 8000억 달러의 두 배를 넘는 돈이었다. 서머스는 이념과 정파에서 벗어나 경제를 냉정하게 진단한 것이다. 서머스의 완승으로 끝났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부와 대척점에 있다. 문 정부 때 손상된 재정 건전성을 복원해야 하는 책무를 안고 있다. ‘작은 정부, 긴축’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한다. 하지만 경기가 악화하고, 금리를 내릴 수 없다면 마지막 기댈 곳은 재정이다. 문 정부와 무조건 반대로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경제 상황에 따라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정상적이라면 문 정부 때 아껴 쓰고, 지금 풀어야 하는데…. 거꾸로 가는 듯하다. 문 정부가 잘못한 건 전 국민 재난지원금, 일회성 공공근로처럼 효과는 없고 생색만 내는 현금 살포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 버릇을 못 고쳤다. 최근에도 민주당은 포퓰리즘 성격이 짙은 30조원 추경을 들고 나왔다.

경기를 부양하려면 재정을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는 ‘3T 지출’을 권하고 있다. 선별적으로(Targeted) 한시적이며(Temporary) 적기에(Timely). 최악의 상황은 올 하반기에도 물가 불안으로 고금리가 계속되고, 정부가 부양과 내년 총선을 의식해 재정지출을 급작스럽게 확대하는 경우다. 두 정책이 충돌하며 불황이 깊어질 수 있다. 더 나빠지기 전에 재정의 역할을 따져봤으면 한다. 경제는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