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신장섭의 이코노믹스

정치에 묶인 기업, 그 굴레부터 풀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경제활력 회복, 5대 긴급 제언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

한국경제가 침체 추세를 보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업 투자다. 미래 개척을 위한 과감한 투자가 과거보다 많이 줄었다. 해외투자는 늘리지만, 국내투자는 별로 늘지 않는다. 외국기업들의 국내투자도 많이 줄었다. 투자 없이는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투자를 해야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임금도 올라 소비가 늘고 따라서 성장률이 올라가는 것이다. 좌승희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경제에서 기업자산 증가율과 경제성장률은 뚜렷한 정(正)의 상관관계를 보였다. 기업자산이 증가할 때에 분배지표도 향상됐다.  〈그래픽 참조〉

정부는 현재 경제활력 회복을 위해 규제 완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더 큰 그림에서 접근해야 한다. 자유시장경제라는 철학에 맞춰 기업을 정치의 질곡(桎梏)에서 해방하는 근본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규제 완화’가 아니라 대대적 ‘규제 개편’이어야 한다. 이를 위한 5대 제언은 다음과 같다.

① 공직자 청렴 입증 책임 도입

신장섭의 이코노믹스

신장섭의 이코노믹스

규제가 부패라는 질곡과 연결되는 고리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불필요하거나 잘못된 규제가 있는 경우다. 여기에 사익이 끼어들면 규제를 고치기보다 기업과 ‘딜(deal)’을 해서 뭔가를 얻어내려 한다. 둘째는 규제에는 별문제가 없더라도 공직자가 재량권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경우다. 최근 문제 되는 ‘50억 클럽’이나 부지 용도변경을 둘러싼 뇌물 논란 등이 해당한다.

부패로 인한 질곡의 절대량을 낮추는 한 방법은 공직자에게 청렴 입증 의무를 지우는 것이다. 싱가포르 총리실 산하의 탐오조사국(貪汚調査局, CPBI)은 부패 혐의가 있는 공직자에게 재산형성과정을 입증하라고 한 뒤 소명하지 못한 금액을 뇌물로 판단한다. 한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입증 책임이 수사당국에 있기 때문에 소명 못 하는 재산이 있어도 수사망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무죄가 된다. 그래서 거액의 현찰이 집에서 발견된 정치인, 거액 아파트를 현찰로 매입한 공무원들이 ‘버티기’를 한다.

그러나 싱가포르 제도에서는 부패를 꿈꾸는 ‘간 큰’ 공직자가 대폭 줄어든다. 특히 대형 부패는 여러 공직자가 함께해야 하는데, 협조할 사람을 찾기 어렵게 된다. 부정부패에 투입되는 수사 역량도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민간에게 청렴 입증 의무를 지우는 것은 사생활 침해일 수 있다. 하지만 공복(公僕)은 처음부터 청렴을 맹세하고 세금을 받는 사람이다. 사생활 침해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투자 없는 일자리·성장은 공염불
미래 향한 기업들 투자 크게 줄어

미·일·중 세계 100대 기업 느는데
한국, 2010년부터 삼성전자 유일

대기업 악마화는 경제 질서 파괴
규제완화 넘어 대대적 개편 필요

② 법치주의 경영과 정책 확립

부패 총량을 대폭 줄이는 환경을 만든 뒤 따라와야 할 것은 기업과 정부가 법 정신에 맞춰 경영하고 규제하는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다행히 현 정부는 법치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원칙은 기업이 법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업 목적과 방법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정부는 개입을 자제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혁신가의 창의성이 꽃을 피운다.

이 원리가 잘 지켜지지 않았던 데는 기업과 정부에 모두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기업은 법인(法人)을 통한 주식회사다. 주주들이 유한책임을 지는 대신 법인이 회사 자산을 소유하고 사업에 무한책임을 진다. 이 체제에서는 대주주가 경영에 참여할 때 주식회사 원리에 맞춰 이사회 중심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대주주가 ‘독단’을 하거나 회사를 ‘사금고’처럼 사용하는 사례들이 기업 비판 빌미를 제공했다. 정부는 반기업정서에 편승해서 명시적·묵시적 규제를 전방위적으로 늘려왔다.

아비요나(Avi-Yonah)와 시반(Sivan) 교수는 법인이 “주주와 국가의 부당한 개입으로부터 기업 경영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체”라고 강조한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온 제도적 토대다. 주식회사 원리에 맞춰 경영할 때 기업은 불필요한 사회적 개입을 막고 사업 확장에 집중할 수 있다. 정부도 불편부당하게 기업을 대하면서 경제활력 회복을 꾀할 수 있다.

③ 대기업 육성해 ‘질 좋은’ 일자리 창출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법치주의 경영과 정책이 확립되지 못하면서 나타난 병폐는 ‘대기업의 악마화’다. 대기업이 ‘부당하게’ 확장하고 경제 질서도 파괴한다는 통념이다. ‘경제민주화’는 그런 통념에 따라 강화됐고, 대기업 규제는 경제적 합리성을 떠나 ‘정의’로 여겨지는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어느 나라건 대기업이 성장 동력이다. 대기업이 되는 데는 뭔가 잘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비판론자들은 그 비결에 대한 천착은 뒤로하고 ‘피해’라는 것들만 조명한다. 경쟁에서 뒤진 것이 성공한 대기업 때문이라는 피해자 코스프레가 횡행한다.

정부는 대기업 악마화를 억제하는 소극적 대책을 넘어 대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포브스에 따르면 세계 100대 기업에 들어간 한국 기업은 2010년에 삼성전자 하나였는데, 2020년에도 변함없다. 이 기간에 미국은 28개에서 37개로 늘었고, 중국은 7개에서 18개로 늘었다. 일본조차 3개에서 8개로 늘었다. 경제성장은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여러 개 탄생할 때 탄력을 받는다.

대기업 육성은 ‘질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질 좋은 일자리 창출을 바라면서 대기업 강력 규제를 주장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좋은 일자리는 대기업에 많다. 마찬가지 원리에서 대기업이 계열사를 설립하는 것도 격려해야 한다. 그동안은 이를 ‘재벌식 확장’이라며 억제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새로운 법인 설립을 통한 확장은 주식회사의 핵심적 성장 방법이다. 재벌 계열사는 신규 회사라 하더라도 대체로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대기업이 번 돈을 주주에게 나눠주기보다 어떤 형태로든 사업 확장에 쓰는 것을 독려해야 한다.

④ 공정거래정책 소비자 중심으로 개편

현재 대기업 육성에 가장 큰 제도적 장벽은 공정거래정책이다. 한국 공정위는 전 세계에 유례없는 갈라파고스적 규제기관이다. 다른 나라는 사후 규제 중심이다. 그러나 한국은 불공정 행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들을 미리 막으려 한다. 30대 대기업집단 지정, 순환출자 규제, 계열사 내부거래 제한 등이 다른 나라에 없는 사전 규제 항목들이다.

사후 규제가 보편적인 이유는 공정거래 정책의 궁극적 목표가 소비자 후생이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경쟁해서 값싸고 질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해야 소비자 후생이 높아지는데, 독과점이나 담합이 생기면 소비자 후생이 손상된다. 그래서 ‘경쟁제한행위’를 통해 소비자에게 피해가 갔다는 혐의가 있을 때 공정경쟁 당국이 행동을 취한다. 이런 체제에서는 알파벳이나 마이크로소프트가 계열사를 300~400개까지 거느리며 ‘문어발식 확장’을 해도 아무 규제가 없다.

반면 한국 공정위는 출범 때부터 대기업 규제라는 목표가 앞섰다. 대기업 규제를 ‘공정’과 동일시했다. 예를 들어 공정위는 삼성웰스토리에 직원 급식을 맡긴 삼성그룹에 사상 최대인 2349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런데 소비자 대부분은 삼성 직원들이다. 웰스토리 급식으로 이들이 무슨 피해를 봤는지, ‘단체급식 대외개방’으로 소비자 후생이 어떻게 높아질 것인지 아무 해명이 없다.

실제로 공정위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2021년에 1조원 이상의 과징금을 부과했는데, 93.9%에 해당하는 금액에 대해 불복 소송을 당했다. 패소해서 기업에 돌려준 돈이 3000억원에 육박한 해도 있었다. 공정위 처분의 ‘공정성’을 의심할 만한 수준이다. 자유시장경제는 ‘소비자가 왕(王)’인 사회다. 기업과 정부는 모두 ‘소비자의 종’이다. 공정거래정책을 소비자 중심으로 대전환해야 한다.

⑤‘연금 사회주의’ 흐름 되돌려야

국민연금은 기본 성격만 보면 기업투자에 가장 든든한 파트너다. 연금은 가입자의 노후자산이기 때문에 장기적 안목에서 자금을 굴려야 한다. 기업도 장기투자를 지속해야 좋은 성과가 나온다. 같은 안목을 가진 주체들끼리 협력할 일이 많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지금 자유시장경제의 적(敵)이 되어 있다. 그동안 대폭 강화되어온 연금 사회주의 경향 때문이다. 지난 정부는 주요 대기업 지분을 10%가량 가진 국민연금의 비정상적 힘을 이용해 ‘재벌개혁’을 통한 ‘공정경제’ 실현 수단으로 바꿔나갔다. 수탁자 책임위원회를 독립시켜 주주제안 등을 통해 대기업을 통제하는 센터로 만들어나갔고, 현 정부에서도 그 권한을 확대하는 안이 관성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연금이 공정을 내세워 압력을 넣는 것은 직권남용이다. 연금가입자는 수익을 잘 내달라고만 위임했을 뿐이다. 국민연금을 기업의 장기투자를 감시하고 지원하는 동반자로 원위치시키는 정상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