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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용 키오스크 의무화에도...휠체어 높이 안 맞고 음성 안내 없어 '무용지물'

중앙일보

입력

뇌병변 장애인 배재현(43)씨는 장애인용 키오스크(무인정보 단말기) 설치가 의무화 된 지난 28일 서울 창동의 한 카페를 찾았다. 그러나 최씨는 팔을 뻗으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커피는 손이 닿는 높이에서 주문할 수 있었지만, 정작 최씨가 마시려고 한 차 메뉴는 키오스크 상단에 있어 팔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씨는 “화면 위쪽은 애를 써야 간신히 누를 수 있다”고 탄식했다. 팔을 뻗는 사이 배씨 뒤로 손님 두 명이 들어섰다. 결국 옆에서 지켜보던 장애인 활동지원사 김병관 씨가 배씨를 대신해 화면을 눌러 대신 주문을 해야 했다.

지난 28일 서울 도봉구 창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배씨가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지난 28일 서울 도봉구 창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배씨가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배씨가 이날 찾은 다른 카페 두 곳은 매장 입구 바로 앞에 키오스크가 설치돼 있어, 키오스크를 쓰려면 휠체어로 매장 입구를 막아야 했다. 주문을 하는 동안 배씨는 다른 손님이 오지는 않는지 연신 뒤를 돌아봤다. 배씨는 “입구를 나만 이용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공간이 이렇게 좁으면 현실적으로 이용이 어렵다”고 말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 시행…기준 맞는 키오스크 설치 0건

28일부로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은 키오스크 운영자로 하여금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키오스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따라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 상태다. 장애인 키오스크는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위치에 설치돼야 하고, 키오스크 하단엔 휠체어 발판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확보돼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시각장애인이 키오스크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끔 키오스크 인근엔 점형 유도 블록을 설치하거나 음성안내를 제공해야 할 의무도 있다.

하지만 이날 기자가 배씨와 함께 찾은 도봉구 쌍문동과 창동, 강북구 수유동 카페·식당 등 9곳 중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개정령안 기준에 맞는 키오스크가 설치된 곳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 9곳 중 휠체어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는 화면의 키오스크를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던 한 영화관의 경우에도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안내 기능은 없었다. 한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도 ‘장애인’ 버튼이 있어 누르면 직원이 호출됐지만 화면이 높이 있어 휠체어에 탄 채로 볼 수 없는 데다가, 화면 내용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 역시 없었다.

이날 배씨와 함께 찾은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카페. 키오스크 화면이 높이 위치해 휠체어 탑승자가 화면을 볼 수 없다. 김민정 기자

이날 배씨와 함께 찾은 서울 도봉구 창동의 한 카페. 키오스크 화면이 높이 위치해 휠체어 탑승자가 화면을 볼 수 없다. 김민정 기자

휠체어 탑승자도, 시각장애인도 이용 어려워

지난해 6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연)가 서울, 경기 등 15개 지역 공공기관 및 음식점 등 매장 키오스크 1002개를 실태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529건, 52.8%)에 휠체어가 접근할 여유 공간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휠체어 이용자가 쉽게 쓸 수 있도록 조작 버튼이 높이 120cm 아래에 위치한 경우는 289건(28.8%)에 불과했다. 키오스크 조작판에 점자 표시가 된 경우는 121건(12.1%), 키오스크 근처에 점자유도 블록이 설치된 경우도 85건(8.5%)뿐이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보건복지부는 자영업계가 입을 타격 등을 고려해 2024년 1월 공공기관, 교통시설부터 시작해 2025년 1월 100인 미만 사업주까지 단계적으로 개정 시행령을 적용해나가겠다는 입장이다. 바닥면적 50m² 미만의 소규모 시설은 상시 지원 인력이 있는 경우 키오스크 설치 대상에서 제외되고, 지난 28일 이전에 설치된 키오스크의 경우 3년간 적용이 유예된다. 장추연 이승헌 활동가는 “명목뿐인 개정령안"이라며 "시행을 차일피일 미루는 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동등하게 보라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자체의 취지에도 어긋난다"고 했다.

반면에 자영업자들 사이에선 장애인용 키오스크 설치로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호소도 나오고 있다. 장애인용 키오스크 가격이 일반 키오스크의 4~10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서초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A씨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키오스크를 쓰는 건데, 안 써도 된다면 비싼 장애인용 키오스크를 굳이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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