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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덕 前 장관 "지금이야말로 대북 심리전 재개할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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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방송과 전단은 우리의 강력한 비대칭 전략 자산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통일부 장관을 지낸 강인덕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92)가 지난달 발간한 회고록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에서 "이제는 북한에 대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적극적인 심리전을 전개할 때"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1970년대 중앙정보부에서 북한정보국장, 심리전 국장 등을 거친 강 전 장관은 대북 심리전 관련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 중앙포토.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 중앙포토.

대북 심리전의 대가

강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을 테마로 해 체제 실상을 부각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는 1980년부터 18년 동안 KBS의 사회교육방송 '노동당 고급 당간부들에게' 등 최소 5000회에 걸쳐 대북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외부 소식에 어둡던 북한 주민들은 그의 방송을 듣고 동요했다. 실제 1983년 2월 미그-19 전투기를 몰고 귀순한 북한 공군 조종사인 이웅평 상위는 강 전 장관과 만나 "김일성 연설이나 노동당의 문헌을 갖고 북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남한 방송을 듣고 진실을 깨닫고 귀순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북 심리전이 북한이 가장 민감하게 여겨온 비군사적 조치로 꼽히는 이유다.

강 전 장관은 "북한은 나를 '인간 백정' 등 무지막지한 험담으로 공격했지만 그럴수록 합리적 논리와 절제된 언어로 대북 방송을 계속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12월 발간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 1,2 -편조백방(遍照百邦), 투시백년(透視百年)의 기세로』 표지. 1권에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2권에는 1980년대부터 2000년 이후까지 사건이 담겨있다. 후대 중앙정보 분석관에게 남기는 말로 마무리된다. 경인문화사.

지난해 12월 발간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한 중앙정보 분석관의 삶 1,2 -편조백방(遍照百邦), 투시백년(透視百年)의 기세로』 표지. 1권에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2권에는 1980년대부터 2000년 이후까지 사건이 담겨있다. 후대 중앙정보 분석관에게 남기는 말로 마무리된다. 경인문화사.

"文 정부, 전단금지법 착각"

강 전 장관은 "지금이야말로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과 법, 시장 원리 등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심리전을 재개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 세습 체제의 본질을 규탄하고 주체사상, 개인숭배 사상의 문제점 등을 폭로해 집권 세력에 대한 주민의 저항 의식을 배양해야 한다"고 재차 밝혔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대북 유화 정책이 마치 평화의 길인 듯 착각해 대북전단살포금지법(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을 만들었다"며 "당시 법 제정 근거로 든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우리의 군사작전으로 방어하면 될 일이며 이제는 그런 '수세적 자세'는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정부는 올해 들어 문재인 정부 당시 마련된 2018년 9ㆍ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이 정지될 경우 접경지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과 전단 살포 등 심리전 재개가 가능할지 법적 검토를 진행 중이다. 앞서 정부는 천안함 폭침(2010), 목함지뢰 사건(2015), 4차 핵실험(2016) 등 북한의 중대 도발 시 맞대응으로 대북 확성기를 재설치하거나 방송을 재개했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왼쪽)이 지난해 7월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7·4 남북공동성명 50년 기념식'에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권영세 통일부 장관(왼쪽)이 지난해 7월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7·4 남북공동성명 50년 기념식'에서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일성, 美 본토 위협 노려"

강 전 장관은 북한이 1960년대 말부터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핵·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는 정황도 전했다.

그는 1977년 중앙정보부에서 직접 심문했던 노동당 연락부(대남 공작 담당 부서)의 '거물급' 간첩을 인용해 "1968년 김일성이 함흥 현지 지도에서 '아직까지 본토에 포탄 한 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미국이 (북한의) 포탄 세례를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미국 내에서 반전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미국도 남조선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하루속히 원자탄(핵무기)과 장거리 로켓을 자체 생산하여 우리가 미국 본토를 때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연구개발에 힘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강 전 장관은 "지난 50여년의 남북 대화에서 얻은 교훈은 북한에 대한 싸움에는 힘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쟁을 억제하는 길은 전쟁을 준비할 때만 가능하며,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선 강력한 우리의 억제력과 동맹국과의 긴밀한 군사적 협력을 기초로 압박과 협상을 모색해야 하며, 무엇보다 월등한 군사력 우위를 과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강 전 장관은 2019년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과 2020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박지원, 서훈 전 국정원장이 연루된 데 대해 "20여년 전 김정일이 시도했던 국정원의 약화, 해체 공작이 후대인 김정은 시대에 실현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정보원에서 일하는) 북한 정보 분석관은 북한에 대한 확고한 대적관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양 다녀온 뒤 "北 변화 없다"

강 전 장관은 남북이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 원칙을 합의해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 성사 당시 상황도 회고록에 상세히 담았다.

북한 과장으로 합의문 작성에 관여했던 그는 성명에 담긴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의 3대 원칙' 관련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힘이 실릴 것을 우려해 첫째 항 '자주'와 둘째 항 '평화'의 순서를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실제 북한은 성명 발표 당일부터 성명의 주목적이 주한미군 철수에 있다고 주장했다"고 지적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중앙포토.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중앙포토.

강 전 장관은 7·4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설치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를 위해 평양에 대표단으로 파견됐는데, 당시 김일성 주석이 "통일하자면 정치 합작 이외의 다른 방법이 없다" 등 "유독 '합작'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회고했다. 이에 그는 내부 회의에서 "합작은 북한이 기도하는 통일 전선을 의미한다"고 지적했고, 결국 북한이 고수하던 '합작'은 '힘을 합쳐 같이 사업하는'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돼 공동 발표문에 들어갔다.

청와대로 돌아온 강 전 장관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북한은 전략적 변화가 전혀 없고, 합작 실현, 반미·반정부, 통일 전선 형성을 위해 남북 대화에 응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는 1998년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 속에 김대중 정부 초대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장관 시절 1998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1995년 발족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주체로 한 대북 경수로 지원 사업 등 역사적 사건을 맡았다. 강 전 장관은 이와 관련 "장관 취임 이듬해부터 나는 북한 정권의 실체를 서서히 부각시키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의 한계를 직접 지적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에 북한 매체들은 강 전 장관을 해임하라는 비난 보도를 거듭했고, 1년여 만에 자리에서 내려온 그는 이후 일본과 한국 등을 오가며 연구 활동을 했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1932년 평양 출생 △1971∼1978년 중앙정보부 북한국장·심리전국장 등 △1979~1998년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이사장 △1998~1999년 초대 통일부 장관 △1999~2013 일본 세이카쿠인(聖學院) 대학 초빙교수 △2013년~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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