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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선물한 ‘갑옷’ 앞 다짐…‘제2의 밀월’ 과시하는 英-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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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리시 수낵(왼쪽) 영국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왼쪽 둘째) 일본 총리가 지난 11일 영국 런던타워에 전시돼 있는 일본식 갑옷을 함께 관람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리시 수낵(왼쪽) 영국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왼쪽 둘째) 일본 총리가 지난 11일 영국 런던타워에 전시돼 있는 일본식 갑옷을 함께 관람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우리 관계는 과거 깊은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런던타워에서 나는 기시다 총리에게 약 400년 전 당시 일본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 선물한 갑옷을 보여줬습니다. 이 갑옷은 새로운 시대 양국 관계의 핵심을 이루는 안보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지난 11일 런던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12일자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닛케이)에 보낸 기고문 한 대목이다. 일본이 1613년 영국에 친선 상징물로 보낸 갑옷이 400여 년 뒤 양국 우애와 번영의 아이콘으로 부활한 셈이다.

일본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1613년 당시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 양국 간 친선의 상징으로 선물한 뒤 런던타워에 보관되고 있는 일본식 갑옷 2벌 중 하나. 사진 런던타워 홈페이지 캡처

일본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1613년 당시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 양국 간 친선의 상징으로 선물한 뒤 런던타워에 보관되고 있는 일본식 갑옷 2벌 중 하나. 사진 런던타워 홈페이지 캡처

유라시아대륙 양끝 섬나라 英ㆍ日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섬나라 영국과 동쪽 끝 섬나라 일본. 지구 반대편에 놓인 양국 사이에 점도를 높이는 밀월 관계가 최근 두드러진다. 2023년 주요 7개국(G7) 의장국을 맡아 연초 주요국 순방에 나선 기시다 총리는 11일 유럽의 마지막 순방지로 영국을 방문했다. 이날 영국ㆍ일본 총리는 상대국 군대와 공동 훈련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안보 협정인 ‘원활화 협정(RAA)’에 서명했다.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는 중국 견제 차원에서 두 나라의 군사협력 강화 의지가 담겼다. 영국 총리실은 “1902년 영ㆍ일 동맹 이후 가장 중요한 안보 협정”이라고 했다.

리시 수낵(오른쪽) 영국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1일 영국 런던타워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에서 ‘원활화 협정(RAA)’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리시 수낵(오른쪽) 영국 총리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1일 영국 런던타워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에서 ‘원활화 협정(RAA)’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02년 러시아 견제 위해 ‘영ㆍ일 동맹’

양국의 동맹 복원 과정은 120여 년 전 국제 정세와 닮은 측면이 있다. 당시 러시아와 패권 경쟁을 벌이던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과 1902년 체결한 게 영ㆍ일 동맹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최강국 영국을 근대화 롤모델로 삼던 일본은 동맹을 격하게 환영했다. 당시 런던에 유학 중이던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는 “마치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과 인연을 맺어 기쁜 나머지 종과 북을 두드리며 마을을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러시아에 대항해 편을 맺은 영ㆍ일이 지금은 중국에 맞서 제2의 동맹을 다지는 격이다.

영ㆍ일 관계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국익이 충돌하자 동맹이 사실상 중단됐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서로 전쟁 상대국으로 맞서는 등 최악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러다 전후 1950년대 들어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고, 양국은 점차 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서 서로 큰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일본에선 비틀스나 해리포터 등 영국 문화를 활발하게 소비한다. 영국 역시 포켓몬스터 등 일본 문화에 빠져 들었다. 스시ㆍ라면 등 일본 요리도 인기다.

영국, ‘글로벌 브리튼’ 파트너로 일본 필요

최근 양국의 밀착은 서로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강하다. 영국 입장에선 신흥 패권 국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파트너, 또 브렉시트(유럽연합ㆍEU 탈퇴) 이후 ‘글로벌 브리튼’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우호적 동아시아 파트너가 필요했다. 영국이 EU 탈퇴 이후 주요국과 독자적 무역협정을 체결(2020년 10월 경제동반자협정ㆍEPA)한 첫 국가가 일본이기도 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일본, 인ㆍ태 전략 파트너로 영국 중요

일본 입장에서도 인도ㆍ태평양 전략 파트너로서 미국의 제1동맹국이자 국제 외교 영향력이 큰 영국과의 우호 관계가 중요했다. 일본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막 집권한 2012년 영국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으면서 안보 협력을 본격화했다.

이런 흐름에서 원활화 협정까지 맺으며 방위 협력 수준을 더욱 끌어올리자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앞서 지난해 말 일본은 2035년 배치를 목표로 영국ㆍ이탈리아와 차세대 전투기 공동 개발에도 들어간 상태다.

지난해 12월 9일 리시 수낵(오른쪽 둘째) 영국 총리가 일본ㆍ이탈리아와 함께 2035년 배치를 목표로 차세대 전투기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고 발표한 뒤 영국 링컨셔의 코닝스비 공군기지를 방문해 기지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2월 9일 리시 수낵(오른쪽 둘째) 영국 총리가 일본ㆍ이탈리아와 함께 2035년 배치를 목표로 차세대 전투기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고 발표한 뒤 영국 링컨셔의 코닝스비 공군기지를 방문해 기지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신냉전 혼돈 속 현명한 외교 절실

수낵 총리는 닛케이 기고문에서 “(전투기 개발을 통해) 양국은 향후 수년간 세계 유수의 산업과 기술 부문을 연계시키고 수천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더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는 큰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맹을 위해서도 일본과 협력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12일자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닛케이)에 실린 리시 수낵 영국 총리의 기고문. 수낵 총리는 기고문에서 “중국의 패권에 맞서 영국은 일본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사진 닛케이 홈페이지 캡처

지난 12일자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닛케이)에 실린 리시 수낵 영국 총리의 기고문. 수낵 총리는 기고문에서 “중국의 패권에 맞서 영국은 일본과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사진 닛케이 홈페이지 캡처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영ㆍ일 관계가 다시 끈끈한 동맹으로 결속한 것은 국제 질서의 격변을 상징한다. 미ㆍ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신냉전’의 혼돈이 다가오면서 시시각각 이뤄지고 있는 합종연횡의 재편이다. 냉엄한 국제 정세 속에 놓인 한반도 외교의 현명한 대처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일본, 호주 이어 영국과 ‘원활화 협정’으로 중국 견제

영국ㆍ일본 양국 총리가 연초 서명한 ‘Reciprocal Access Agreement(약칭 RAA, 상호접근협정)’는 군 부대의 상대국 방문 시 협력사항을 규정한 ‘방문부대 지위 협정’의 하나다. 양국 군대가 공동 훈련 등을 위해 상대국에 체류할 때 입국심사 면제는 물론 무기ㆍ탄약 반입 절차 등을 간소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복잡한 대규모 공동 군사훈련을 간단한 절차만으로 시행할 수 있어 일본 등에서 통칭 ‘원활화 협정’으로 불린다.

일본이 RAA를 체결한 것은 호주가 처음이고 영국이 두 번째다. 호주와는 지난해 1월 6일, 그리고 영국과는 지난 11일 각각 공식 서명했다. RAA의 목적은 중국 견제와 인도ㆍ태평양 지역 영향력 확대로 요약된다. 중국은 “가상의 적을 만들어 집단 대항의 낡은 사고방식을 아시아ㆍ태평양 지역에 끌어들여선 안 된다”(왕원빈 외교부 대변인)며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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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구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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