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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억류 95일, 韓정부 상대 소송 1년…국제분쟁도 기업 책임?

중앙일보

입력

2021년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되는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 모습. 오른쪽이 이란 혁명수비대가 타고 온 고속정이다. 사진은 나포 당시 CCTV 모습. 송봉근 기자

2021년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되는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 모습. 오른쪽이 이란 혁명수비대가 타고 온 고속정이다. 사진은 나포 당시 CCTV 모습. 송봉근 기자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더 이상 이어가기가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2021년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군에 나포됐던 ‘한국케미호’ 선사 디엠쉽핑 관계자 A씨는 27일 통화에서 소송 얘기를 꺼내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디엠쉽핑은 “당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보호 조치에 나서지 않아 회사에서 직접 돈을 내고 풀려났고, 막대한 영업 손실까지 봤다”며 2021년 9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재판이 시작된 지 1년이 넘은 상황에서 먼저 두 손을 든 건 선사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부장 김형석)가 이날 연 3차 변론기일에서 선사 측이 조정 의사를 밝힌 것이다.

한국케미호는 2021년 1월 바다를 대규모로 오염시켰다는 이유로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혁명수비대에 나포됐다. 미국의 대(對)이란 제재로 한국에 동결된 원유 수출대금 70억 달러를 받기 위한 게 이란의 속내라는 건 뒤이어 드러났다. 한국케미호 선장은 한국 정부가 이란 정부가 내야할 유엔(UN)분담금 1600만 달러를 국내에 동결된 자금을 풀어 납부해주고 코백스 퍼실리티를 통해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억류 95일 만이었다. 그럼에도 선사는 이란이 요구한 거액의 해양오염 손해배상금도 부담해야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선사 측은 ▶정부가 나포 위험 가능성을 사전에 알려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사후에도 구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보당국이 사전에 이란군의 나포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는 취지다. 선사 관계자 A씨는 “정치적인 문제로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 정부는 해양오염 여부에 대한 조사도 없이 이란 정부와 원유 대금 문제를 협상한 것 말고는 한 게 없다”고 성토했다. 선사 측이 한국 정부에 26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한 건 이 때문이다. 영업 손실과 거액의 배상금을 정부가 물어내라는 것이다. 디엠쉬핑은 배상금을 내기 위해 한국케미호를 팔아야 했다. 선사 측은 소송을 제기한 뒤 한국케미호 매각 과정에서 입은 손실 부분을 제외해 청구액을 15억원가량으로 줄였다.

반면, 정부는 ▶나포 되기 전 호르무즈 해협 관련 공문을 발송했고 ▶협상 과정에서도 이란 정부가 요구한 배상액을 100분의 1 이상으로 줄이는 등 의무를 다 했다는 입장이다. 당시 주변 관련국과도 협의해 사안 해결에 최선을 다했다고도 주장한다.

재판의 쟁점들은 해외에 도사리는 신체와 영업상의 손해발생 위험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는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야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근본적 질문과 맞닿아 있다. 어떤 법규정에도 그 구체적 기준이 등장하진 않는다. 대한민국헌법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34조 6항)고 규정하고 있다. 재난안전법에도 ‘국가는 재난이나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진다’(4조)고 돼 있다. 국가의 자국민 보호책임을 포괄적이고 선언적으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성우린 변호사(법무법인 대륙아주)는 “대한민국 정부가 자국민에 대해서 어디까지 보호할 의무가 있느냐 이런 문제까지 연결되는 일”이라며 “정부가 외국에서 통행하는 선박의 안전까지 보호해 줄 의무가 있는지 고민해 볼 만한 사안”이라고 짚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해양법 전문가도 “국가가 해외에서 발생한 사고에 모두 책임질 수 없다”며 “국가배상소송 자체가 진행될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구출 작전에 나섰는지 등은 구체적인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쟁점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 보호가 기본적인 국가 책무인 만큼 국제 정세 속에 위기에 처한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며 “긴밀한 외교적 협의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구출 작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복잡해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이 사건처럼 민간 기업이 국가 간 갈등으로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당장 원유 운송 등을 위해 우회할 수 없는 항로인 호르무즈 해협 일대에서는 이란혁명수비대 활동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계속해서 나온다. A씨는 “원유대금 동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우리나라 국기를 단 선박들이 모두 전전긍긍하며 다니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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