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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시대 과도한 자녀 사랑은 독, 중용의 미덕 지켜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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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호 28면

러브에이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손꼽히는 모성애(母性愛). 조건 없는 헌신적 사랑으로 통용되며 표준국어대사전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 사랑으로 정의한다. 모성애는 세상에 나온 생명체의 성장 과정을 지켜주는 생명줄이다. 만일 모성애가 없는 종족이라면 2세 생존율이 너무 낮아져 지구촌에서 도태될 확률이 높다. 모성을 종족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로 보는 이유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성애도 진화과정을 거친 여성의 원초적 본능일까. 또 21세기 대한민국호의 최대 난제인 초저출산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참고로 본능은 태생적으로 유전자에 각인돼 학습하지 않아도 지니는 성질이다.

모성애, 뇌의 양육 회로 활성화 결과

한국의 초저출산 현상은 최근 빈번하게 이슈화되지만 시작은 최소한 20년 이상, 길게는 반세기에 걸쳐 진행됐다. 실제 합계출산율은 1984년 1.74명으로 미국보다 낮아졌고 1993년에는 1.65명으로 프랑스를 밑돌았다. 새천년이 시작된 2001년에는 출산율이 일본보다 낮은 1.31명이 되면서 초저출산국으로 진입했다. 통상 출산율이 1.3명 이하면 초저출산, 1.3명에서 2.1명(인구 유지 수준)이면 저출산에 해당한다. 급기야 2018년에는 출산율이 0.98 명을 기록하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 후에도 2019년 0.092명, 2021년 0.81명, 2022년 0.78명(추정)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만일 출산과 모성애가 여성의 본능이라면 작금의 상황은 한국 여성의 유전자에 새겨진 모성 본능이 퇴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면 고도로 발달한 4차산업 시대를 맞아 한국이 새로운 첨단 사회상을 선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걸까.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yang.yujeong@joongang.co.kr

18세기 칼 폰 린네는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현생인류를 사피엔스로 명명했다. 사피엔스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뿐 아니라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노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고 신세계를 열어가는 초인적 존재이기도 하다.

정신의학적으로도 인간의 마음에는 본능을 따르고 싶은 욕망(慾望), 본능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조정하는 자아(自我), 양심과 도덕을 대변하는 초자아(超自我)가 공존하며 이 세 요소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를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본다.

저출산은 지난한 진화과정을 거친 사피엔스가 20세기에 과학적 피임법을 발명해 번식 본능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성적인 능력이 원초적 본능을 극복한 셈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은 임신과 출산의 주체다. 피임이 없던 시절에는 초경 이후 평생을 임신과 출산, 양육에 매여 살아야 했다. 사피엔스 고유 영역인 지적, 문화적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극소수 여성에게 허용된 정신적 사치였다. 하지만 출산과 양육의 부담이 줄면서 여성의 삶도  선택지가 확대됐다. 또 교육의 보편화는 과학적인 피임법을 이용하는 인구를 확산시켰다.

21세기 국가별 출산율은 사회문화적 선진화 정도와 여성의 교육 수준을 반영한다. 실제 고학력 여성이 많은 선진국의 출산율은 낮은 반면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이 많은 후진국의 출산율은 높다. 한국은 가임기 여성의 교육 수준이 대학 진학률 70% 이상일 정도로 세계 최고다. 출산율 세계 최저 수준은 그다지 이상한 상황도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사피엔스의 모성 본능은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약해지도록 프로그램된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최근 의과학계는 모성애가 여성의 태생적 본능이 아니라 육아 과정에서 뇌의 양육 회로(parenting circuit)가 활성화된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남녀를 떠나 현대인은 이성의 힘으로 번식 본능을 조절하면서 삶의 질을 극대화시키는 접점을 찾는다. 본능이 이성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니 21세기 사피엔스는 선조보다 진화한 셈이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도구로 뭔가를 만드는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경제적인 인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20세기 피임법 발명 후 저출산 도래

한국 사회의 초저출산 현상은 호모 이코노미쿠스, 루덴스, 사피엔스 등 여러 속성이 혼재된 사회문화적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호모 이코노미쿠스에게 자녀는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재산 등을 나눠줘야 하는 존재다. 호모 루덴스에게 자녀는 본인의 놀이(문화생활) 시간을 쪼개서 돌봐야 하는 대상이다. 복잡한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는 현대인에게 자녀 수를 결정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지금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하면 한국이 초저출산 국가에서 탈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성의 지배를 받는 한국 청년들의 집단지성이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뒤바꿀만한 합리적인 대안을 찾기는 어렵다. 사정이 이러니 이제는 파격적인 이민 정책을 통해 외국의 슬기로운 청년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국민적 합의를 얻기에 아직은 역부족이다. 과연 적절한 저출산 대책의 실체는 무엇이며 언제쯤 제시될 수 있을까.

초저출산만큼 심각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문제점은 모성(부성)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자녀에 대한 과도한 간섭과 양육 태도다〈표 참조〉. 최선의 양육은 아이의 시기별 성장 단계에 맞게 사랑도, 관심도 적절한 수준에 머무르는 ‘중용’의 미덕을 초지일관 지키는 일이다.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필요한 시기는 걷기 전 영아기다. 이 시기가 지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 부모는 아이에게 해도 되는 일(YES)과 안 되는 일(NO)을 명확하게 반복해서 알려줘야 한다. 만일 자녀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과 사랑, 개입 등이 두 돌 이후에도 지속하면 아이는 자신감 결여, 따돌림, 반항장애, 불안증, 우울증 등을 가진 채 성장하기 쉽다. 자녀가 심신 건강한 아이로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라면 자신의 모성(부성) 표현이 적절한 수준인지 수시로 점검해 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다수의 칼럼을 연재했다.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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