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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공소서 조각한 김청정, 첨단 기법으로 미니멀 아트 구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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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호 26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김청정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미니멀 아트 조각가다. 엄격한 도면 설계에 의한 기하학적 구성의 작업을 해왔다. [사진 김청정]

김청정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미니멀 아트 조각가다. 엄격한 도면 설계에 의한 기하학적 구성의 작업을 해왔다. [사진 김청정]

조각가 김청정(1941~ )은 키가 크다. 외모도 이국적이다. 미니멀한 조각 작품은 서구적이다. 김청정은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곧 부산 시내 대청동으로 옮겨가서 자랐다. 큰 형님이 일하던 피복회사의 적산가옥 2층이 그들의 거처였다. 부친은 식자, 조판, 제본 등 인쇄 일을 하였다. 대청동에는 인쇄소가 많아 출퇴근하기가 좋았다. 해방되자 미군이 부산으로 진주했다. 대청동 용두산 기슭의 동양척식회사 건물(미 문화원을 거쳐 부산근대역사관이 됨)은 미군들의 레스토랑이 되었다. 김청정의 집은 바로 길 건너였다. 처음 맡아보는 커피 냄새가 고소했다.

토목과 출신, 도면 제작에도 능숙

어린 김청정에게 해방의 감격은 미군 레스토랑의 커피, 도넛, 팝콘 냄새에 실려 왔다. 김청정은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2년 늦었다. 원래 이름도 기영이다. 해방 이듬해 김청정은 제 나이로 용두산 기슭의 동광국민학교에 입학해 한 학기를 다니다 근처의 남일국민학교로 전학했다. 바늘을 구하러 집으로 온 미군들이 도넛을 주었다. 그 맛이 기가 막혔다. 학교에서는 미군 부대에서 가지고 온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문방구 등을 쌓아 놓았는데 한 사람당 3개만 골라야 했다. 김청정은 크레용, 스케치북과 서양 팽이를 골랐다. 스케치북의 종이가 너무 좋아 그림을 그리기가 아까웠다.

남일국민학교 5학년이 되던 해 6·25 전쟁이 났다. 이번에는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적산가옥인 김청정의 집 방 두 개는 그들의 몫이 되었다. 남일국민학교는 국군병원으로 접수되었다. 복병산에 천막을 치고 수업을 했다. 비가 오면 휴교였다. 대청동의 집은 방첩부대가 접수했다. 복병산 기슭, 지금의 메리놀 병원 왼쪽으로 이사를 했다. 복병산, 용두산, 자갈치 시장, 점쟁이 동네와 영도 다리가 놀이터였다. 그림을 그렸다. 자갈치 시장의 얼음 공장은 그리기가 재미있었다. 담력이 큰 아이들은 영도 다리에서 바다를 향해 다이빙했다. 김청정은 바다 수영을 하는 친구들의 옷을 지켰다.

전쟁이 나자 보수동에 헌책방 골목이 생겼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만화책은 화려한 컬러 인쇄였다. 영어를 알 리가 없는 소년 김청정은 미국 만화에 몰두했다. 영어를 몰라도 다 알만한 내용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김청정은 동아중학교를 거쳐 부산공고 토목과 학생이 되어 있었다. 문현동 부산공고 담벼락을 따라 흐르는 동천 도랑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판자로 세운 하얀 아틀리에가 있었다. 방 한 칸에 그림을 그리는 공간, 그리고 화장실 이게 전부였다. 이 아틀리에를 만든 장본인은 당시 부산공고 미술 교사였던 화가 박고석(1917~2002)이었다. 박고석 부부가 살던 동천 아틀리에를 이중섭이 찾아와 밤새워 술도 마시고 은지화도 그렸다. 그들이 상경하자 부산공고 미술 교사 김경(1922~1965)이 이 아틀리에를 인수했다. 이번에는 하인두, 김영덕 등이 찾아왔다. 고교생 김청정도 학교 앞 김경의 동천 아틀리에를 자주 찾았다.

무제, 철, 198xØ55㎝, 1969년. [사진 김청정]

무제, 철, 198xØ55㎝, 1969년. [사진 김청정]

김경은 신문지로 기름기를 뺀 유화 물감으로 퍽퍽한 흙 느낌이 나는 채색의 그림을 그렸다.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서 재건에 필요한 물자들을 부산공고에 우선 배정했다. 그 덕에 풍요롭게 마트지와 포스터컬러를 쓸 수가 있었다. 대학에도 없는 큰 용량의 전기로가 부산공고에는 있었다. 김청정은 김경이 하던 대로 테라코타 마스크 작업을 해보았다. 전기로에서 꺼낸 테라코타가 다 식기 전에 신문지로 감싸면 불이 붙고 재가 들러붙어 시커먼 색채의 테라코타가 만들어졌다. 토목과 학생 김청정에게 도면 그리기 수업은 필수였다. 아이디어를 설계하고 난 후 그림으로 옮겨 그리거나 입체로 제작하는 건 미니멀 아트의 본령이다. 훗날 미니멀 아트 조각가가 된 김청정의 조형적 소양은 부산공고에서 충분히 가꾸어지고 있었다. 김경은 김청정에게 조각을 권유했다.

나중에 판화가가 된 이용길(1938~2013)은 김청정보다 한 해 위로 서면에 있던 부산상고 학생이었다. 그는 수업을 일찍 마치고 부산공고로 와서 미술반과 어울렸다. 일본에 살던 이용길의 어머니는 몇 달 지난 일본 잡지를 헐값에 사서 부산으로 보내었다. 이걸 광복동에서 비싸게 되팔면 이용길의 학비가 되었다. 미술수첩, 미즈에 등 미술 잡지도 그 안에 있었다. 김청정은 친구 덕에 마음껏 일본의 미술 잡지들을 보며 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미술의 현장을 확인했다.

김경과 김청정은 사제지간 이상으로 친했다. 1958년, 김경이 서울 서대문의 인창고로 전근했다. 이 해 김청정은 신촌의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면 학교 근처의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키고 고량주를 사주었다. 김경의 집은 불광동에 있었다. 근처에는 화가 이규상(1918~1964)이 살았다. 이규상의 부인은 일본인이었다. 손님이 가면 설탕물을 대접했다. 설탕이 귀할 때였다. 선배 화가 두 분과 김청정, 이 세 사람은 막걸리 됫병을 받아다 함께 마셨다. 김경과 이규상은 술을 마시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술잔을 앞에 놓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느린 시간에 몸을 맡겼다. 젊은 김청정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혼자서 벌컥벌컥 마셔야만 했다.

40대에 먹기 시작한 고향의 소울푸드

왼쪽부터 김청정, 심문섭, 김남조, 박석원, 엄태정, 부산, 1999년. [사진 김청정]

왼쪽부터 김청정, 심문섭, 김남조, 박석원, 엄태정, 부산, 1999년. [사진 김청정]

홍대 조소과 실습실에는 철조를 위한 카바이드 산소 용접기 토치가 2개 있었다. 선배인 박종배가 새벽부터 작업하며 용접기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김청정은 마산상고 출신의 박종배, 진해고 출신의 박석원과 친했다. 박종배가 김청정의 졸업을 축하하며 신촌의 연탄불 드럼통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 잔을 샀다. 김청정이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걸 알 리 없는 선배의 사랑이었다. 생선회, 생선구이, 먹장어구이 등 부산 음식을 좋아하는 김청정이건만 부산 사람들의 소울 푸드인 돼지국밥을 먹을 줄 알게 된 건 40대 중반을 넘겨서였다. 훗날 후배 박석원은 부산의 김청정을 서울이 활동 기반인 AG그룹으로 끌었다.

1962년 대학을 졸업한 김청정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김경의 집으로 갔다. 본채에서 좀 떨어진 화실에서 한 달간 살았다. 스승은 제자의 하루 치 담배 반 갑을 방에 넣어주고는 학교로 출근했다. 김청정은 그해 진주농고 임시교사를 거쳐 1963년에는 진해중학교 미술 교사로 발령을 받는다. 화가 유택렬이 운영하는 흑백다방에서 진해, 마산의 미술인들과 교유했다. 2년 후 본향인 부산으로 갔다. 복병산 기슭의 본가에서 출퇴근하며 배정고, 동래중학교, 부산남고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한 후 신라대학 교수로 교직에서 은퇴했다.

1968년 영도에 있는 부산남고에서 근무할 때 나사 형태의 조각(무제,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을 제작했다. 정밀한 작업을 맡길 데가 마땅치 않았다. 영도에는 조선소와 선박수리소가 많았다. 외삼촌이 철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큰 키에 서구적인 얼굴, 김청정은 외삼촌을 많이 닮았다. 외삼촌은 조카를 아꼈다. 흔쾌히 조각 작업을 맡았다. 석고 작업은 부산남고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서 했다. 이를 영도의 선박 스크루 제작소로 가져가 주물로 떴다. 이를 외삼촌의 철공소에서 선반으로 더욱 정밀한 형태로 깎아내어 자동차 도장으로 마감했다. 당시로써는 최첨단 기법으로 제작한 모던한 조각품이었다. 영도의 선박수리소 근처에는 허름한 술집이 많았다. 잡어를 올려놓고 소주를 팔았다. 김청정과 철공소 사장인 외삼촌 그리고 김청정의 작업을 도와주는 기술자 이 세 사람은 저녁마다 술을 마셨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하루의 노동을 씻어주었다.

1989년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있었다. 완벽주의자 갤러리스트 황현욱은 그의 전시를 위해 6m 층고의 갤러리 한쪽 벽면을 원하는 색상으로 칠해주겠다고 했다. 사양했더니 대신 알콜로 그 넓은 흰 벽과 바닥을 꼼꼼하게 다 닦았다. 미니멀 아트는 작품의 양태를 최대한으로 환원하고 절제함으로써 타력본원의 더 큰 몰입과 소통을 끌어들인다. 묵묵한 작품과 텅 빈 공간, 미술에서 설계의 중요성을 아는 두 사람이 협력한 전시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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