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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의 우아한 복수…“파트2 통쾌한 결말은 아닐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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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호 19면

‘더 글로리’와 여성 복수극의 진화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같이 칼춤 춰 줄 망나니가 필요한 거지.”

장안의 화제인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의 여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의 대사다. 퍽 상징적이다. ‘파리의 연인’(2004)부터 ‘미스터 션샤인’(2018)까지 멜로드라마의 왕좌를 사수해 온 김은숙 작가가 처음으로 복수극에 도전하는 출사표인 동시에, 요즘 드라마 시청자들의 마음의 소리로 들려서다.

바야흐로 복수극 전성시대다. ‘빈센조’(2021)를 비롯해 ‘모범택시’(2021), ‘악마판사’(2021) ‘돼지의 왕’(2022), ‘3인칭 복수’(2022) 등이 1, 2년새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법망을 비껴가는 악인들을 사적 복수로 응징하는 ‘다크 히어로’가 대중을 열광시킨다.

김은숙·송혜교의 변신에 열광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이 대열에 송혜교가 합류했다. ‘태양의 후예’를 비롯해 로맨스 일변도였던 송혜교가 학교폭력 피해자로 변신해 18년간 치밀하게 준비한 복수를 실행해 가는 의외성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안길호 감독의 전작 ‘비밀의 숲’에서 감정을 잃어버린 황시목 검사(조승우)가 떠오를 만큼 웃음기 싹 지운 이미지 변신이 놀라운데, 김은숙과 송혜교의 변신에 세계가 들썩인다. 넷플릭스 아시아 1위, 세계 4위를 찍었고, 미국 매체 ‘인사이더’가 한국문화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15가지 복선을 분석한 기사를 냈을 정도다.

사실 현대극에서 사적 복수를 소재 삼은 콘텐트는 늘 정당성이 화두가 됐고, 복수의 주체도 참담한 결말을 맞곤 했다. 아내와 딸을 무참히 살해한 강도들은 물론, 출세를 위해 범죄자와 형량 거래를 한 법조계까지 살벌하게 응징하는 영화 ‘모범시민’(2009), 어린 딸을 짓밟고도 처벌받지 않는 소년들을 직접 처단하는 영화 ‘방황하는 칼날’(2014)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 대중은 다크 히어로가 ‘내 복수도 대신해 주길’ 바라는 눈치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정당성보다 정의 실현을 바라는 대중은 공정성에 민감해진 시대를 반영한다. 늘 평등한 삶에 대한 욕구 불만족 상태라서다. 조지선 연세대 심리학과 객원교수는 “10여년 전만 해도 계층 격차를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면, 이제 SNS를 통한 비교가 일상이 되면서 수저계급론이 나오고 공정성에 민감한 세상이 됐다”면서 “법이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지수가 올라간 상태에서 시스템이 못해주는 복수를 히어로가 해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송혜교의 흑화가 낯설 뿐, 여성의 복수극도 드물지 않다. 요즘 MBC ‘마녀의 게임’으로 컴백한 장서희가 일일드라마 판 ‘복수의 여왕’이다. 2000년대 그가 주연한 ‘인어아가씨’(2002)와 ‘아내의 유혹’(2008)이 조강지처를 버린 남자를 응징하는 서사였다면, ‘마녀의 게임’은 거대악의 음모와 출생의 비밀까지 엮어 자극의 수위를 높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OTT라는 뉴미디어를 타고 노골적인 학폭 장면을 묘사하며 드라마계 ‘청불’ 여성 복수극의 새 장을 열었다. 사실 여성 복수극은 원래 잔인한 게 특징이다. 가냘픈 여성이 잔인한 복수를 할 때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여성 복수극의 원형인 일본 영화 ‘여죄수 사소리’(1972)와 ‘슈라 유키히메’(1973)부터 사무라이 영화 특유의 잔혹함을 무기로 탄생했다. 난폭한 남성성에 대한 원한과 잔혹한 복수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애틋한 모성이다. 가장 성공한 여성 복수극으로 꼽히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2003)이 두 작품을 오마주한 이래, ‘남성 대 여성’과 ‘모성’ 클리셰는 여성 복수극의 공식이 됐다.

지금까지도 남성 대 여성이라는 이분법은 여성 복수극의 마스터플롯이다. 2021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2020)도 의대생들의 집단 성폭행 소재인데, ‘전도유망한 청년의 삶을 망칠 수 없다’며 성범죄자 남성에게 관대한 세상을 비꼬고 있다. 지금 핫한 넷플릭스 시리즈 ‘우먼 오브 더 데드’(2022) 역시 주인공 남편의 갑작스런 사고사 배후에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상류층 남성들의 성폭행 카르텔이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치밀한 전략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해 가는 복수극 플롯으로 글로벌 인기를 얻고 있다. [사진 넷플릭스]

여성 복수극은 왜 이렇게 천편일률적일까.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아주 오랫동안 억압과 피억압 계층의 대립을 남성 대 여성으로 은유해 왔고, 그 구조를 바로잡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며 “권선징악의 대주제를 살리기 위해 선악 구분의 서사가 중요하고, 여성 복수의 정당성을 돋보이게 하는 데 모성애만한 것이 없다. 특히 복수의 모멘텀을 자신을 넘어 자식이나 가족이라는 지켜야 할 대상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국의 ‘청불’ 여성 복수극도 ‘친절한 금자씨’(2005)부터 ‘악녀’(2017)까지 젠더 이분법과 모성 클리셰로 설득력을 갖춘 피칠갑 액션의 공식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더 글로리’의 미덕은 이 해묵은 공식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는 점이다. ‘더 글로리’의 세계관은 훨씬 다층적이다. 개인의 원한을 학폭과 수저계급론이라는 사회적 문제로 확장시켜 ‘펜트하우스’ 급으로 대중의 분노 수위를 끌어올렸다.

드라마 평론가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더 글로리’는 복수보다 학폭의 폭력성과 사회적 심각성에 방점이 찍힌다”고 강조했다. “학폭이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집중해서 보여주고, 제도가 마비된 상황에서 사적 복수를 통해서라도 파괴된 영혼을 애도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공권력마저 학폭에 마비된 근원이 신자유주의 이후 재력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계급질서라는 것이 공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동은의 복수는 젠더와도 무관하다. 복수의 칼이 겨눈 절대악은 여성인 연진이다. 남성은 오히려 복수의 도구로 쓰인다. 복수극이라는 장르물에 주여정(이도현)과 하도영(정성일)이라는 삼각 로맨스 바이브도 그다지 생뚱맞지 않다. 김은숙이 첫 장르물에 자신의 장기를 아낌없이 갈아 넣은 양념이라 맛깔스럽다.

두 남성보다 더 강력한 여성 조력자 강현남(염혜란)이 있기에 그렇다. “우리 손에 피 묻힐 일 없을 것”이라는 동은의 대사처럼, 그녀들의 복수에 액션은 없다. ‘파트1이 끝났는데 복수는 시작도 안 했다’는 불만이 있지만, 복수는 이미 진행되고 있다. 바둑 두듯이 가해자들의 성역을 조금씩 파고들며 악의 카르텔 안에서 서로를 해하는 지옥을 한창 건축 중이다. 첫 타깃인 명오의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윤소희 시신을 빌미로 연진을 자극한 결과로 암시된다.

태국 등 해외서도 학폭 공론화

미나토 가나에 소설 원작 영화 ‘고백’. [사진 각 영화사]

미나토 가나에 소설 원작 영화 ‘고백’. [사진 각 영화사]

김은숙은 모성 클리셰도 박살냈다. 모성이 불타는 건 오히려 가해자 쪽이다. 무속 광신자인 연진 모친이 비뚤어진 모성을 전시하고, 예솔에 대한 연진의 모성은 복수의 트리거가 된다.

핵심은 피칠갑의 카타르시스 없이 심리전으로 덫을 놓는 ‘우아한 복수’다. ‘아름다운 복수극’이라 불리는 일본 영화 ‘고백(2010)’이 액션 없이도 비주얼 거장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상미와 함께 더욱 잔혹한 복수극이 된 것과도 같다. 중학교 여교사가 딸을 죽인 소년들을 심리전으로 응징하는 서사가 충격을 던졌고, 촉법소년 연령 기준을 하향한 소년법 개정에 불씨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 영화다.

언어폭력이 신체폭력보다 큰 상처를 주듯, 이런 간접 공격이 때론 더 강렬하다. 조지선 교수는 “헛소문을 내거나 투명인간 취급하는 왕따가 더 심한 폭력인 것처럼, 노골적인 공격이 아니라도 치밀한 장기 플랜을 켜켜이 완성해 가는 동은을 지켜보는 시청자는 그 은근한 공격성에 오싹함을 느낀다. 그래서 피 한방울 없이도 더 잔혹할 수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최신작 ‘우먼 오브 더 데드’. [사진 각 영화사]

넷플릭스 시리즈 최신작 ‘우먼 오브 더 데드’. [사진 각 영화사]

그럼 3월 10일 공개되는 파트2의 복수의 끝은 어떨까. 동은이 연진의 딸 예솔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복수를 완성하는 방식이 무엇일지, 전 세계의 촉각이 곤두서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아름다운 K복수극’인 이유는 따로 있다. 폭력적 액션을 소비하고 마는 여타 복수극과 달리, 태국 등 해외에서까지 ‘학폭’을 공론화하고 있어서다. 한동안 판타지 속에 머물던 드라마가 글로벌하게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획득한 것이다.

윤석진 교수는 ‘더 글로리’를 ‘복수극’이라는 오락 영역으로 한정짓는 것을 경계하며,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 폭력적 행위를 묘사한 것은 극적 재미가 아니라 어젠다 세팅을 위한 것이고, 학폭의 심각성에 대한 경종과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파트2에서 통쾌한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복수가 이뤄지더라도 피해자의 영혼은 회복될 수 없다. 파괴된 영혼이 자기 삶까지 포기하고 선택한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게 윤 교수의 말이다. 조지선 교수도 “‘엄마는 내가 죽도록 맞고 오는 것과 죽도록 패고 오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가슴 아플 것 같냐’는 딸의 질문이 집필 계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지금 패고 있는 동은도 고통스러울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혀도 스스로 벌 받는 쓸쓸한 결말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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