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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바보야, 문제는 중도층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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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디렉터

김정하 정치디렉터

여야의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정상적이라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지지층 확대에 팔을 걷어붙일 타이밍이지만, 요즘 서로 질세라 당의 울타리를 좁히지 못해 안달이다. 여야 모두 당권 유지를 위해 골수 지지층하고만 소통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여의도 경험이 없는 검사 출신 대통령과 비리 혐의로 기소될 가능성이 큰 야당 대표가 대칭 구도를 형성할 때부터 징조가 심상찮긴 했다. 아니나 다를까 뚜껑을 열어보니 정치판이 상궤(常軌)에서 벗어난 정도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여는 친윤 독주, 야는 이재명 로펌 #외연확대 없이 골수지지층만 의존 #중도층 먼저 잡는 쪽이 총선 승기

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이 1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당 대표 불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국민의힘 나경원 전 의원이 1월 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당 대표 불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국민의힘은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꾸준히 외연을 축소하고 있다. 20대 남성층에서 인기가 있던 이준석 전 대표를 축출한 데 이어, 중도층에서 일정 지분이 있는 유승민 전 의원의 전당대회 출마를 봉쇄하려고 경선 룰을 바꿨다. 그러다 이번엔 보수층에서 인지도가 높은 나경원 전 의원이 당권 도전을 시사하자 대통령실과 친윤계가 십자포화를 퍼부어 결국 그를 주저앉혔다. 이를 두고 이 전 대표의 ‘싸가지’, 유 전 의원의 ‘삐딱선’, 나 전 의원의 ‘과욕’이 화를 자초했다는 평가도 있다. 아마 부분적으론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사건은 친윤계가 내년 총선의 공천권을 장악하기 위해 견제 세력을 사전 제압한 것이란 게 총체적 진실에 가깝다고 본다. 이런 일들은 윤 대통령 강성 지지층이 환호할 소재이겠으나, 당 외곽의 연성 지지층이나 잠재적 고객인 중도층에겐 눈꼴사납게 비치기 십상이다.

한국 유권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강자의 힘자랑이다. 2016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에서 기세등등하던 친박계가 ‘진박(眞朴) 공천’ 운운하며 위세를 과시하다 한숨에 몰락했던 걸 벌써 까먹은 것 같다. 윤 대통령은 보수가 총집결한 지난해 대선에서 고작 0.73%포인트 차로 승리했다.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이 전 대표, 유 전 의원, 나 전 의원의 지지자들을 모두 끌어모아도 될까 말까다. 그런데 뭘 믿고 저러나.

'성남FC 후원금' 의혹을 받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0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출두해 입장문을 읽으려고 할 때 한 시민이 “목소리가 작습니다. 쫄았습니까”라고 외치자 이 대표가 ‘쉿’하는 동작을 취하는 장면. [사진공동취재단]

'성남FC 후원금' 의혹을 받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월 10일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출두해 입장문을 읽으려고 할 때 한 시민이 “목소리가 작습니다. 쫄았습니까”라고 외치자 이 대표가 ‘쉿’하는 동작을 취하는 장면. [사진공동취재단]

국민의힘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더불어민주당도 상태가 비슷하단 거다. 어쩌면 더 심각한 수준일지 모른다. 최근 민주당이 한 일 중에 ‘이재명 대표 방탄’ 말고 국민에게 인상을 남긴 게 뭐가 있나. 대장동ㆍ성남FC 등 이 대표가 받는 혐의는 민주당하곤 상관도 없는 일인데 마치 당 전체가 이 대표 변호를 맡은 로펌처럼 움직인다. 가정이지만 만약 이 대표에게 유죄가 나오면 당을 해체라도 할 요량인가? 169석의 공당이 대표 개인의 법적 문제에 당 전체의 운명을 거는 건 블랙 코미디다. 지난 22~23일 유권자 2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엠브레인퍼블릭 여론조사(95% 신뢰도, 표본오차 2.2%포인트)에서 검찰 기소 시 이 대표의 거취를 묻는 질문에 ‘대표직을 사퇴해야 한다’가 63.8%, ‘대표직을 유지해야 한다’가 27.9%였다. 심지어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세 명 중 한 명(33.4%)은 이 대표가 물러나야 한다고 봤다.

1월22~23일 실시된 YTN-엠브레인퍼블릭 여론조사에서 '검찰 기소시 이재명 대표 거취'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결과 [엠브레인퍼블릭 제공]

1월22~23일 실시된 YTN-엠브레인퍼블릭 여론조사에서 '검찰 기소시 이재명 대표 거취'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결과 [엠브레인퍼블릭 제공]

게다가 민주당이 방탄에 몰두하면서 당의 혁신 논의가 실종된 게 더 큰 문제다. 20년 집권을 큰소리치다 5년 만에 정권을 빼앗겼으면 대선 패배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은 어떤가. 아직도 대선이 진행 중인 것처럼 “윤석열 악마화”(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에만 열중할 뿐 자기 성찰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면 이 대표의 ‘개딸’이야 열광하겠지만, 새로운 지지층이 유입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상기 여론조사에서 지지정당이 없다는 유권자는 전체의 24.4%였다. 특히 18~29세에서 44.5%였고, 30대에서도 32.8%나 됐다. 내년 총선의 향배는 20~30대 중도층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야 중 어디라도 먼저 이성을 되찾고 외연 확대에 나서는 쪽이 총선에서 승기를 잡을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