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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민호의 레저터치

강진 읍성 동문 밖 주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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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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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레저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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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1762∼1836)은 서른아홉 살이던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다산은 강진에서 약 18년을 견딘 뒤 쉰여섯 살이던 1818년 경기도 남양주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진까지 내려갔을 때 다산은 더이상 임금을 가르치던 대학자가 아니었다. 강진에서 다산은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천주학 수괴(곽재구, ‘귤동리 일박’ 부분)’일 뿐이었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 강진 사람들이 보인 행동을 역사는 ‘파문괴장(破門壞墻)’이라는 구절로 증언한다. 서학쟁이가 나타나자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며 달아났다’는 뜻이다.

전남 강진 읍내에 있는 ‘사의재’.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4년간 머물렀던 주막의 다른 이름이다. 손민호 기자

전남 강진 읍내에 있는 ‘사의재’.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4년간 머물렀던 주막의 다른 이름이다. 손민호 기자

강진에서 다산이 구한 첫 처소는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라고 전해온다. 동문 밖 밥파는 집. 강진 읍성 동문 밖 주막의 늙은 주모만 서학쟁이를 받아줬다. 이 주막 행랑채에서 다산은 4년을 살았다. 허구한 날 무뢰배들의 술주정에 시달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천하의 다산도 유배처에선 밥을 벌어야 했다. 낮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 『소학』을 읽혔다. 왕을 가르치던 다산이 남도 갯마을 주막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다산이 남긴 500여 권의 저작 중엔 『목민심서』처럼 후세가 기리는 역작도 있으나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책도 있다. 『아학편훈의』는 다산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손수 지은 교재다.

다산이 주막에서 가르친 황상·이청 같은 이들이 훗날 ‘강진 6제자’가 된다. 이들 강진 6제자와 함께 다산은 만덕산 자락 초당에 들어가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이룬다. 나는 다산의 저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저작이 주막 행랑채에서 지은 저 아동용 교재라고 믿는다. 어떻게든 살아내야겠다는 의지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다산이 빌붙어 연명했던 주막 행랑채의 다른 이름이 ‘사의재(四宜齋)’다. 생각·용모·언어·동작 네 가지를 반듯이 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다산이 지었다. 오죽했으면 주막집 더부살이 주제에도 의연함을 찾으려 했을까. 이름에서 자신을 부단히 단속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이 사의재가 최근 정치권에 등장했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이 포럼 ‘사의재’를 결성했다고 한다. 사의재를 ‘다산이 저서를 편찬하며 머물렀던 강진 처소’라고 설명한 정치 뉴스를 보고 실소가 비어졌다. 사의재는 대학자의 고상한 집필실이 아니었다. 어느 날 세상에서 내팽개쳐진 남자의 어찌할 수 없는 피신처였다. 이 비루한 자리에서 다산은 체면을 버렸다. 생의 의지만 붙들었다.

문재인 정부 인사들은 다산의 절박했던 마음을 알고 사의재를 소환했을까. 혹시 재기의 꿈을 벼른 아지트처럼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아시는지 모르겠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와 18년을 더 살았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고향에서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