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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급등, 英 난방비 폭탄…"배곯는 아이들 음식 훔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파로 에너지 요금과 식료품비가 폭등하면서 41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한 영국에선 저소득층 수백만명이 생활비 부족으로 웜뱅크(warm bank, 난방을 제공하는 공공장소)와 푸드뱅크(무료 급식소)를 전전하고 있다. 난방비가 전년 대비 최대 700%까지 오르면서 한겨울 한파에도 저소득층 가정의 상당수가 아예 집 안 난방을 포기했다.

영국의 한 소도시에 마련된 웜뱅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다. EPA=연합뉴스

영국의 한 소도시에 마련된 웜뱅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다. EPA=연합뉴스

25일(현지시간) 영국 웹사이트 웜웰컴스페이스에 따르면, 현재 영국 전역에 웜뱅크 4121곳이 문을 열었다. 웜뱅크는 주로 도서관·교회·커뮤니티센터 등 공공 장소에서 난방을 제공해 지역민들이 무료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지방 의회 예산이나 민간단체, 기업 재단의 후원 등으로 운영된다.

웜뱅크로 몰려오는 사람 수도 크게 늘었다. 영국 동부 도시 링컨의 한 교회에 마련된 웜뱅크 운영자는 “올 겨울 정기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전했다. 이 교회 코디네이터 케이 셜록은 “매일 40~50명이 찾아온다. 유아를 동반한 가족, 10대 학생들, 70~8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이곳에서 추위를 피하고 있다”면서 “항상 라디에이터를 뜨겁게 켜놓고 언제든 방문하라고 말하면 매우 기뻐한다”고 말했다.

북아일랜드에 위치한 크럼린 커뮤니티 허브도 이 지역 웜뱅크 중 하나다. 허브 책임자인 시오반 머피는 “얼어붙은 집에 앉아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며 “이곳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난방과 식사 중 뭘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걸 자주 본다”고 말했다.

영국은 지난해 10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41년 만에 최고치인 11.1%를 기록하는 등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0.5%로 다소 하락했지만 여전히 두자릿수를 기록해 가계 재정에 압박을 주고 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특히 가정용 전기 및 가스 요금 상승이 인플레이션을 견인하면서 ‘연료 빈곤층’이 대폭 늘었다. 영국 의회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가스·전기 요금은 전년 대비 각각 129%, 66% 증가했다. 민간단체 ‘연료 빈곤 중단 연대’에 따르면 수입의 10% 이상을 난방비로 지출하는 연료 빈곤층이 2020년 369만 가구에서 지난해 700만 가구로 늘었다.

가디언은 저소득층이 연료비 상승에 직격타를 맞았다고 지적했다. 개별 난방을 이용하는 일반 가정은 오프젬(가스·전기시장 규제기관)의 에너지 상한제와 영국 정부의 에너지가격보장(EPG) 정책으로 보조금 등 혜택을 받고 있지만,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중앙난방 시스템의 공동주택 거주자들은 이같은 혜택에서 제외됐다. 중앙난방을 이용하는 저소득층이 지불할 난방비는 최대 700%까지 올랐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저소득층은 “힘없는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다. 너무 불공평하다”고 토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영국이 난방비에 이어 집세까지 역대 최고 수준으로 오르면서 저소득층뿐 아니라 정규직 근로자까지 식료품비가 모자라 푸드뱅크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전했다. 영국 전역에 푸드뱅크를 운영 중인 트러스셀 트러스는 지난해 상반기 신규 이용자가 30만 명 늘었고, 현재 푸드뱅크 이용자 5명 중 1명이 직장인이라고 전했다.

간호사 앨리사 마르카노(46)는 최근 처음으로 런던 동부 해크니 푸드뱅크를 찾아 콩, 비스킷, 파스타 통조림을 얻어왔다. 마르카노는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12살 딸을 위해 핫도그와 햄버거를 도시락으로 싸줬지만, 이제 그마저도 어려워 푸드뱅크에 손을 내밀었다.

영국 런던 중심부의 수퍼마켓의 한 쇼핑카트에 식료품이 담겨 있다. 지난달 영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5%로 가계에 큰 압박을 주고 있다. EPA=연합뉴스

영국 런던 중심부의 수퍼마켓의 한 쇼핑카트에 식료품이 담겨 있다. 지난달 영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5%로 가계에 큰 압박을 주고 있다. EPA=연합뉴스

배를 곯는 어린이 수도 크게 늘었다. 해크니 푸드뱅크는 지난달 런던에서 647명의 어린이들에게 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이는 전년(330명) 대비 크게 늘어난 수치다. 일부 학교에선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빈민층 지역에선 교사들이 교문 앞에서 학생은 물론 학부모에까지 아침 식사용 토스트를 무료로 나눠주고 있다. NYT는 “저소득층 아이들의 경우 하루 중 유일하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 게 학교 급식 뿐”이라고 전했다.

런던의 극빈층 지역 학교 10곳의 관리 책임자인 크리스탈라 자밀은 “일부 학생들은 전날 부모가 푸드뱅크에서 얻어온 쿠키 한 봉지를 도시락으로 싸온다”고 말했다. 학교 급식 자선단체 셰프스인스쿨스는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은 친구가 가져온 음식을 훔쳐 집으로 가져가거나 운동장에 숨어 있다”며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런던 동부의 푸드뱅크를 운영하는 킹슬리 프레데릭은 “앰뷸런스 요원, 학교 보조교사들이 푸드뱅크에 온다. 우리의 공동체,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영국 노동연금부 대변인은 정부가 저소득층의 생활고를 인식하고 있으며 저소득층의 생활비 지원을 위해 수십억 파운드를 투입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론조사업체 유고브 설문조사에 따르면 최근 한 달 새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른 사람의 비율이 11%로 나타났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5%였는데, 배를 넘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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