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가정보원 등 안보 당국이 수사 중인 '제주·창원 북한 간첩단 사건'이 '2006년 일심회 사건'과 '2011년 왕재산 사건'에 맞먹는 대표적 간첩 사건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정부 때 본격화된 대화 국면에서 이뤄졌는데, 이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화해·협력 분위기가 마련된 뒤에도 북한이 남측 진보 인사들을 포섭하는 방식의 대남 공작을 비밀리에 벌여온 것과 유사한 패턴이란 지적이 나온다.
"6·15 이후 최대 간첩"
'일심회' 사건은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6년 10월 알려졌다. 당시 검찰은 간첩단을 검거한 뒤 "6·15 공동선언 이후 최대 간첩 조직"이라고 칭했다. 당시 북한은 국내 정치권의 86세대(1980년대 학번·1960년대 출생)와 운동권을 노렸는데, 진보 정당과 노동계 관계자들을 포섭해 국내에 지하 조직을 결성하도록 지시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2021년 기소된 '충북동지회' 사건은 물론, 현재 수사 중인 제주 'ㅎㄱㅎ(한길회)' 사건, 창원 '자주통일 민중전위' 사건과 유사하다.
일심회는 '하나 된 마음으로 한반도 전체의 주체사상화를 위해 노력하자'는 뜻이다. 2002년 1월 북한의 대남 공작 부서인 대외연락부(현 문화교류국)의 지령으로 조직됐는데, 주범인 재미교포 사업가 장모 씨를 주축으로 민주노동당의 최모 씨, 이모 씨 등이 포섭됐다.
검찰에 따르면 일심회 조직원들은 중국 등 제3국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나 기밀을 보고하고 지령과 공작금을 받았다. 당시 일심회가 넘긴 자료에는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등 각 정당의 내부 동향 및 정책 방향, 주요 정치인 신상 정보, 대선·총선·지방선거 예측 자료 등이 포함됐다.
법원은 일심회 관련자 5명에게 징역 4년에서 9년까지 중형을 선고했다. 다만 일심회 자체에 대해선 국가보안법상 조직적 결합체에 이르지는 못했다며 '이적 단체'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회사 세워 자금 마련도
2011년 7월 적발된 '왕재산 사건'은 총책 김모 씨 등 5명이 1990년대 초반 북한에 포섭돼 20년 가까이 간첩 활동을 한 사건이다. 검찰에 따르면 김 씨는 1993년 8월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 지령를 받고 2001년 '왕재산'이란 단체를 결성했다. '왕재산'은 북한이 김 주석의 항일유적지로 선전하고 있는 함경북도 온성의 산(山) 이름이다.
2013년 대법원은 주범인 김씨 등 관련자의 이적 행위에 대해 징역 2년부터 9년을 선고했지만, 왕재산이라는 단체 결성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왕재산 이전의 간첩단이 북한에 재정적으로 의존한 것과 달리, 왕재산은 합법 기업을 직접 설립해 활동자금을 마련했다. 2001년 11월 출판 전문 벤처기업 '코리아콘텐츠랩'을 만들어 '선전 거점책'으로 삼았고 자금 조달을 위해 2002년 6월 IT기업 '지원(志遠)넷'을 세웠다. 총책 김모 씨를 대표로 내세운 지원넷은 북한 225국(현 문화교류국)으로부터 핵심 기술을 지원 받아 ‘주차장용 차량번호 인식시스템’ 등을 개발ㆍ판매해 2009년 기준 약 22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또 수사 결과 이들은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 기법을 사용해 북측의 지령을 받고 국내 정세와 군사 정보를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테가노그래피는 비밀 메시지를 그림이나 음악 파일로 위장해 암호화하는 방식이다. 당시 북한 간첩 수사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는데 이후 2013년 민족춤패 '출' 대표 사건, 2021년 충북동지회 사건, 최근 제주·창원 간첩단 사건 등에서 주요 대북 교신 수단으로 꾸준히 활용되고 있다.
최근 북한의 간첩단은 국내 여론 분열을 최우선 목적으로 한 사실상 '사이버 조직'으로 진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익명을 원한 한 대북 소식통은 "남측 인사를 포섭해 지하 조직을 결성한다는 기본 수법은 과거와 유사하지만, 과거 대면 접촉 중심 공작에서 최근에는 사이버 드보크(온라인 비밀 무인함), 스태가노그래피 등 첨단 기술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간첩 행위의 양상도 과거 적화통일 추진에서 최근에는 남한 내 혼란을 부추기는 활동 중심으로 달라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