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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민노총 포섭 위해…北, 차관보급 베테랑 간첩 투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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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이 121만명에 달하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의 지도부를 포섭하기 위해 투입한 대남 요원 이광진은 “차관보급의 독보적 베테랑 간첩”이라고 대북 소식통이 25일 전했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서울 사무실 압수수색을 마친 후 압수물이 든 상자를 들고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서울 사무실 압수수색을 마친 후 압수물이 든 상자를 들고 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중앙일보의 취재를 종합하면 안보수사 당국이 민노총 간첩 조직의 총책 혐의로 조사 중인 조직국장 A씨가 주로 만난 북한 공작원은 2021년 청주간첩단 사건의 배후로 밝혀졌던 북한 노동당 산하 대남 공작기구 문화교류국 소속 이광진(여권명 김동진)이다. 당국은 대남 공작의 실질적 지휘자로 이광진을 지목하고, 수년에 걸쳐 그의 동선을 추적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이광진은 한국의 차관보급에 해당하는 베테랑 공작원으로 휘하에 다수의 공작원을 거느린 인물"이라며 "북한에서 해외 공작이 가능한 요원이 많지 않은데 이광진이 단연 독보적"이라고 말했다. 당국은 이광진이 배성룡·김일진·전지선 등 북한 공작원을 지휘한 것으로 파악했다.

“간첩을 지휘하는 간첩” 

외교 소식통도 "북한이 한국 내 진보세력 중 가장 큰 조직 중 하나인 민노총을 핵심 공작 대상으로 보고, 민노총 포섭에 ‘실세 고위직’을 오랫동안 카운터파트로 배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당국에 따르면 A씨는 2016년 8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최소 6차례 이씨를 비롯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과 제3국에서 만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받고 있다. 당국은 A씨가 2018년 9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이광진에게 공작금 1만 달러를 받아 남대문 사설 환전소 등에서 환전하는 모습을 촬영했다고 한다.

이광진이 본명인지도 불투명 

당국은 북한 이광진의 나이를 60대 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북한의 대남사업 요원 및 전투원(무장공비)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1979년 입학했던 인물이라는 첩보가 있다. 고위 탈북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학생들은 입학 때부터 가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4년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기들조차 본명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12월 제주시 노형동 소재 진보당 간부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모습. 뉴스1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12월 제주시 노형동 소재 진보당 간부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모습. 뉴스1

이광진은 당초 문화교류국에서 중국을 주로 담당해오다 중국 공안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상대적으로 감시 수준이 낮은 동남아시아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는 1990년대 부부 공작조 등으로 위장해 여러 차례 국내에 직접 침투한 경력이 있다.

이광진은 2017년부터 북한의 지령에 따라 F-35 스텔스 전투기 도입 반대 운동 등을 벌인 이른바 '청주간첩단' 사건의 배후로도 지목돼 있다. 국정원은 2018년 해당 사건의 구체적 증거를 확보했고, 관련자 4명 중 3명은 현재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적발 이후 북한의 지령에 따라 관련 증거를 상당 부분 파기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실제 당국이 수사 중인 제주지역 간첩 사건에서 드러난 북한 문화교류국과 'ㅎㄱㅎ' 간의 교신·지령 내용은 주로 지난해 주고받은 것이다. 진보정당 간부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뒤 제주지역 노동운동 간부와 농민운동 간부를 포섭해 'ㅎㄱㅎ'을 결성한 시점이 2017년 7월이란 점을 감안하면 초기 교신 및 지령의 상당수가 인멸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최근 대공 수사가 속도를 내는 배경으로 지난해 이뤄진 정부 교체와 코로나 확산을 꼽는다. 국정원 대공수사국이 이광진이 연루된 공작 사건 조사를 본격화했던 시기는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무렵이다. 당시 지휘부에서 간첩 수사에 난감해 하면서 수사에 제동이 걸렸다고 한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익명을 원한 안보수사 당국 관계자는 "2018년 최근 드러난 간첩 사건의 관련자를 처벌하려고 했지만, 당시 정부가 남북 관계 개선 등을 이유로 수사가 보류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문재인 정부 당시 경찰은 안보수사 인력을 공공안보라는 명칭 아래 탈북민, 마약, 전략물자 반출, 정보통신망법 위반자 수사에만 집중하도록 했다"며 본격 수사에 한계가 있었음을 내비쳤다.

이러한 정황은 구체적 수치로도 나타난다. 자유민주연구원에 따르면 2011~2016년 26건이었던 간첩 적발 건수는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2020년에는 3건으로 확 줄어들었다.

여기에 코로나 확산으로 대공 수사망이 집중된 것도 수사 속도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간첩을 직접 내려보내는 이른바 '직파' 비중을 줄이는 대신 중국·동남아 등 제3국에서 공작원의 신분을 세탁해 한국에 입국시켜 한국 내 조직을 포섭하고 복귀하는 수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입국 제한에 국내 잠입 타격”

특히 국내 유입 탈북자의 수가 많아지면서, 탈북자를 활용한 대남공작도 본격화했다. 실제 2000년대 초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조선 도피 주민(탈북자) 속에 우리의 공작 인원을 침투시켜 그들이 효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 실효성이 있다"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2020년 2월 코로나 본격화로 각국의 입국 제한이 강화하면서 북한 공작원의 제3국 접촉이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당국의 수사망도 좁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당국 관계자는 이와 관련 "국내 입국 탈북자 수가 급감한 것은 물론 해외여행까지 제한되면서 북측과 간첩단 간 지령 하달과 보고 확인 과정에서 정체 현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간첩수사는 통상 내사에만 6~7년이 걸리는 등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며 "전문적인 수사 기법을 통해 협의를 입증해야 하는 것은 물론 장기간 척박한 환경에서 수사를 진행하기 때문에 관련 수사 인력들에 대한 지원과 정책 등이 정권 교체 등 정치적 배경과 무관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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