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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피날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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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지난 19일(현지시간) 전격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지난 5년 반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였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정치인도 사람이다. 난 에너지가 고갈됐다”며 사임 이유가 번아웃임을 밝혔다. 이어 “딸의 입학 때 곁에 있는 엄마이고 싶다”며 모성애를 드러냈고, 현장에 있던 약혼자 클라크 게이포드를 향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자”고 프러포즈했다.

갑작스러웠지만 감성적이었던 사임 발표에 대한 일부 전문가의 논평은 아찔한 수준이었다. “자, 봐라. 여자는 총리직의 책임감보다 결혼과 자녀를 앞세운다”며 혀를 찼고, “권력이 여성을 조기탈진시킨다는 건 정설”이라 비웃었다. 영국 BBC는 ‘과연 여성이 모든 걸 가질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올렸다가 독자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바로 수정했다.

아던 총리의 사임을 그저 나약한 여성성의 발로로 치부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친절과 따뜻함에 기반한 유능함이 무엇인지 보여준 드문 리더였다. 그의 재임 기간, 인구 500만 명의 뉴질랜드는 ‘코로나19에 가장 잘 대처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을 확보한 내각’ 등 긍정적인 이슈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9년 모스크 총격 테러(51명 사망, 40명 부상) 땐, 히잡을 쓴 채 현장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다. 참사 6일 만에 반자동소총 판매 전면 금지, 증오발언 금지법 강화 등 단호하고 실질적 조치로 극단주의에 맞섰다. 아픔에 공감하고 공동체를 위한 결단을 내려온 아던 총리의 리더십은 종종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극우 포퓰리즘에 대척점으로 불렸다.

그의 사임 발표엔 반대 세력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저 “일할 능력이 소진됐다”는 진솔한 고백, “악성 여론과 퇴임은 관계없다”고 선을 긋는 태도로 예의 비범한 리더십을 다시 확인시켜줬다. 밴 잭슨 웰링턴 빅토리아대 교수는 “그의 브리핑엔 거짓 정보도, 누군가를 향한 비난도 없다. ‘서로 더 친절하라’는 신호만 있다”고 했다.

한국 정치권은 검찰의 야당 대표 수사, 여당 전당대회 등 안갯속 정국이다. 갈라치기, 프레임 뒤집어씌우기, 교묘하고 사나운 수사 등 꼼수가 총출동한 모양새다. 친절하며 유능했던 ‘아던의 리더십’이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