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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국가적 위기라면서 긴장감도 절박함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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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안이한 저출산·고령화 대책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소위 국정농단 사태로 온 나라가 혼돈에 빠졌던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의 일이다. 하루가 멀다고 눈만 뜨면 충격적인 뉴스가 터져나왔다. 비선실세의 등장과 제3자 뇌물, 대통령 본인의 사생활을 둘러싼 입에 담기 어려운 루머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사회학자인 필자를 가장 깜짝 놀래킨 뉴스는 대통령이 당연직 위원장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 4년반 동안 달랑 두 번 참석했다는 짤막한 보도였다.

자극적인 다른 뉴스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오랫동안 저출산 고령화를 걱정하고 대책을 촉구해왔던 필자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인구절벽’이란 단어를 괜히 쓰는 게 아니다. 저출산 고령화를 방치하면 어느 순간 절벽과도 같은 함정이 나타나고, 일단 거기에 빠져들면 헤어나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에서 자동차를 몰고 빠르게 달리다가 눈앞에 갑자기 절벽이 나타나는 장면을 연상하면 크게 틀리지 않다. “한국 사회의 운명을 가를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이렇게나 무관심했다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관심과 전문성 부족한 정치인이 저출산위 부위원장에
근본적·장기적 대책보다 자리 나눠주기만 고려했었나
야당은 계급갈등 담론에 매여 ‘부자 감세’ 프레임 집착
창의적 정책 일관되게 추진해야 고령화가 기회 될 수 있어

제 역할 못하는 저출산고령화위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비록 국민의힘 당대표 출마 포기로 결론 났지만, 이  문제로 친윤계와 용산 대통령실의 십자포화를 맞았던 나경원 전 의원의 경우도 비슷한 맥락에서 충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언론의 관심은 그가 윤 대통령에 반기를 들고 출마를 강행할 것인지, 출마한다면 초기의 지지율을 회복해서 당선 가능성이 있을 것인지, 누군가와 연대하거나 혹은 여기서 더 나아가 반윤의 구심점이 될 것인지 등에 모였다. 이런 것들은 주로 정치공학적인 관심이라 할 수 있는데, 정책적으로 본다면 애초에 그가 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는지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나 전 의원은 본인이 의정활동 내내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객관적으로 그런 정황을 찾기는 어렵다. 국회 홈페이지의 의정활동 정보를 보면 나 전 의원이 그동안 대표발의했던 67개 법안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중 관련이 있는 것은 2017년에 발의했던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 하나뿐이다. 자녀를 두 명 이상 양육하는 가구에 대해 다자녀카드를 지급하자는 내용인데, 그나마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던 자녀 수에 따른 대출금 탕감제도에 대한 최초의 반박에는 그동안 비교적 조용한 보좌를 해왔던 안상훈 사회수석이 이례적으로 직접 나섰다. 그는 대출금 탕감 제도는 나경원 부위원장의 “개인 의견일 뿐 정부의 정책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윤석열 정부의 정책 기조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안 수석은 교수 시절 대표적인 사회서비스론자로서 현금복지 확대는 복지병을 불러올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었고, 그의 주장은 학계에서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으며,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에도 폭넓게 반영되어 있다.

저출산 고령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정황을 찾을 수 없는 나 전 의원이 관련 정책들의 차이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에서도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보다는 정치인들을 위한 자리 나눠주기가 더 우선적인 고려사항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답습하나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설 명절도 지났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새해가 시작되었다. 2023년의 여러 전망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부양률의 급가속이 시작되는 해라는 점이다. 정확히 말하면 노인 부양률의 급가속이다. 세금을 내서 노인을 부양할 경제활동인구에 비해 부양을 받아야 할 노인의 수가 늘어나는 속도가 본격적인 과속 단계로 접어든다는 말이다. 아동과 노인을 합친 총부양률은 2058년이 되면 10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는데, 부양하는 사람보다 부양받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올해부터 2058년까지 부양률 상승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할 것이고, 그 이후에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한국보다 고령화 시기가 30년 가까이 빨랐던 일본의 경우 이러한 부양률 상승의 변곡점은 1990년대 후반에 찾아왔다. 당시 45% 남짓했던 일본의 부양률이 지금은 72%이다.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의 시기는 흔히 말하는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정책을 펴기에 따라서는 무조건 암울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고령화로 인해 경제활동참여율이 줄고 저축률도 낮아지고 투자가 줄어들고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며 연금체계가 붕괴할 것이라는 우려가 대세였지만, 최근에 나오고 있는 연구들은 선진국의 경우 고령화의 부정적 효과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거나 혹은 심지어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는 연구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려면 창의적인 정책들이 고안되고 장기적으로 일관성 있게 집행되어야 한다. 여성들에게 출산을 늘리라고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많든 적든 태어난 인구를 어떻게 교육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노동력으로 키워내고, 어떤 이민을 받아들일 것이며, 산업구조를 어떻게 재편하고, 세금을 둘러싼 사회적 정의를 어떻게 바꾸고, 초고령사회의 ‘숨겨진 복지국가’인 기성세대의 부동산과 관련한 정책을 어떻게 전환할 것이며, 노인의 기준 연령을 조금씩 올려가고 그들의 경제활동 기간을 어떻게 늘려나갈 것인지, 노인 인구가 특히 취약한 감염병을 비롯해 그들의 건강과 요양과 돌봄의 질을 높이면서 그것에 들어가는 비용을 어떻게 효율화 할 것인지, 최첨단 의료기기 산업의 발전을 통해 노년기에 집중되는 복지비용을 어떻게 절감할 것인지 등 고령화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은 끝이 없고 거의 모든 정책 영역에 걸쳐있다. 대통령이 2년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하거나, 이 분야에 대해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없는 사람을 고위직에 앉혀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고령사회의 진보’ 고민할 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검찰의 2차 소환 통보 직후 다소 뜬금없이 초부자 감세를 거론했다. 명절 밥상머리에 본인의 검찰 소환이 오르기보다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오르기를 바랬을 것이다. 설 차례상 비용이 역대 최고치인데 서민들이 즐겨 찾는 맥주나 막걸리 세금은 올리고 대기업 법인세 인하처럼 초부자에게 퍼주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이다.

사실 초부자 감세라는 프레임은 민주당이 예산안을 심의하는 정기국회 내내 활용했던 것이고, 대선 때 이재명 후보 출사표의 핵심 단어였던 ‘억강부약’이나, 대표정책이었던 기본소득과 그를 위한 국토보유세, 혹은 최근 들어 다시 들고나온 기본사회 정책과 모두 일맥상통한다. 한국의 법인세가 OECD 평균보다 높고 법인세 인하가 투자와 고용을 창출하는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연구들은 가볍게 무시된다. 과거와 달리 요즘은 경제의 낙수효과가 사라져서 그냥 대기업 퍼주기일 뿐이라는 주장은 한국 사회에서 너무 쉽게 받아들여졌다. 실제의 연구들을 보면 과거에 비해 규모는 작아졌지만, 낙수효과는 여전히 존재한다. 효과가 작아졌다고 해서 아예 포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제1야당의 이런 프레임이 가지는 문제는 초고령사회 대비를 위한 창의적 정책논의의 공간을 닫아버리고 여전히 산업사회의 계급갈등 담론에 정책을 묶어버린다는 점이다. 부양률 하나만 놓고 봐도 2058년의 경제활동인구는 지금보다 세금을 두 배는 더 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기본 시리즈로 대표되는 여러 현금 복지를 늘려놓고 부자와 서민으로 계층을 가른 다음 상층에게 세금을 또 더 내라고 하는게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대부분의 인구가 경제활동을 하는 산업사회의 진보(progressive)가 아니라 초고령사회에서도 우리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보(progress)로 거듭 태어나야 진보가 보수보다 더 낡았다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용산과 국민의힘은 정책의 효과를 면밀히 추적하고 분석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국정 철학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점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 법인세 인하의 효과를 임기 말까지 계속 추적해서 실제로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는 점을 입증하고, 세금과 부동산 정책을 정상화했더니 실제로 집값이 내리고 불평등이 완화되며 기성세대의 노후대비 부담이 줄어든다는 점을 입증하고, 약속을 깨뜨린 화물연대의 파업에 강경 대처한 대신 약속을 지켰을 때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여야가 모두 새로운 시대에 맞게 정책의 전선을 새로 정립하지 않는다면 초고령사회의 기회는 사라지고 위기만 남게 될 것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