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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의 용과 천리마] 중국의 대북 ‘히든 카드’는?

중앙일보

입력

1954년 10월 천안문 망루에 오른 마오쩌둥(오른쪽)과 김일성(중국 건국 5주년 열병식).

1954년 10월 천안문 망루에 오른 마오쩌둥(오른쪽)과 김일성(중국 건국 5주년 열병식).

석유와 원자탄이 제일 중요하다. 이것 두 개만 있으면 어디 가도 큰소리칠 수 있다.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두 개를 가져야 한다.

마오쩌둥이 1975년 4월 18일 김일성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다. 이때 김일성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어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힘이 아시아에서 쇠퇴하고 있다고 보았다. 김일성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것은 베트남 사태 외에 주한 미군 철수도 한몫 했다. 닉슨 행정부는 1971년 3월 한국에서 미 7사단과 3개 비행대대 등 2만여 병력을 전격 철수했다. 김일성은 이런 상황이 한반도 적화통일에 호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부랴부랴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동행한 인물의 면면을 볼 때 그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김동규 부주석, 오진우 총참모장, 박성철 부총리, 허담 외교부장, 오극렬 공군사령관 등 북한 최고 간부들을 총망라했다.

마오쩌둥-김일성 회담에는 오진우 총참모장과 덩샤오핑이 배석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부주석과 국무원 부총리, 총참모장 등을 겸직하고 있었다. ‘마오-김’의 회담이 군사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김일성은 “지금이야말로 북한이 남한을 쳐부수고 무력 통일을 이룩할 호기”라며 중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거절했다. 그는 “일부 지역에서 민족해방전쟁이 승리를 거두고 있지만, 지금은 무력을 통해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말할 때 완곡하게 표현하는 버릇이 있다. 말이 둥글고 부드럽다. 하지만 결연할 때는 결연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난 다음 날 병중인 저우언라이도 만났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저우언라이는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무력을 통한 통일은 안 된다. 먼저 더욱 힘을 기르자. 더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되면 그때 통일의 역량을 총집결해야 한다”며 김일성을 만류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이구동성으로 이미 건강이 몹시 쇠약하니 김일성에게 그 문제를 덩샤오핑과 상의하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김일성에게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경제 재건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김 주석이 계획하는 혁명적 전쟁에 관여할 상황이 아니다”라며 잘랐다. 인민일보는 1978년 4월 28일자에 “중국은 조선이 자주적 평화통일을 쟁취하는 투쟁을 견결하게 지지한다”고 보도했다. ‘평화통일’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 이후에도 덩샤오핑은 “조선의 문제는 당신들 자신의 문제”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중국은 김일성에게서 무력 통일이라는 ‘기회’를 빼앗는 대신에 경제적으로는 적지 않은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은 베트남과 알바니아에 대한 원조를 대폭 축소하며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크게 늘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유다.

북‧중은 1972년 2월 조‧중우호송유관(중국명 중‧조우호수유관)을 공동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따른 ‘닉슨 쇼크’의 경제적 보상이었다. ‘닉슨 쇼크’는 북‧중 동맹의 근간이 되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공동 대처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사라지게 했다. 북한은 자신을 가장 위협하는 나라로 생각했던 미국의 대통령을 중국이 초청한 것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중국은 북한을 달래줄 ‘큰 선물’이 필요했다.

이 송유관은 중국 헤이룽장성 다칭유전에서 북한 안주까지 연결하고 있다. 중국 구간은 다칭~톄링~단둥이다. 그리고 중국 단둥~압록강~북한 신의주를 거쳐 평안남도 안주까지 총 1000㎞이다. 공사는 1974년 2월 착공해 1975년 말에 완공했다. 개통은 1976년 1월에 됐다.

그전에 철로로 원유를 이동할 때는 매년 50만t 정도 지원했다. 송유관이 개통된 이후는 연간 100만~150만t 규모로 늘어난 적도 있었다. 송유관 개통과 원유 공급량이 증가한 것은 결국 김일성이 1975년 4월 방중 때 무력 통일을 포기한 것에 대한 ‘대가’였던 것이다. 현재는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 2397호(2017년 12월 23일 실시)에 따라 원유는 연간 50만t 정도 공급이 가능하다.

중국이 단둥시와 북한 평안북도 피현군을 잇는 송유관을 통해 북한에 원유를 공급하고 있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중국이 단둥시와 북한 평안북도 피현군을 잇는 송유관을 통해 북한에 원유를 공급하고 있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그럼 중국이 원유를 북한에 공짜로 줄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물며 국가 간의 거래에서 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북‧중은 국제가격보다 저렴한 우호가격으로 거래한다. 우호가격은 국제가격의 절반 정도로 알려졌다. 중국과 북한이 우의를 기념한다는 뜻에서 지은 ‘조‧중우호송유관’의 이름대로 적용하고 있다. 북한은 원유 대금으로 무연탄‧철광석 등을 중국에 지급한다. 중국은 무연탄‧철광석 등이 원유 대금에 모자라고 현금결제마저 하지 못하면 원유공급량을 줄이기도 한다.

북한은 현재 원유를 거의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로부터 원유를 수입하지만, 양이 아주 적다. 그래서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미사일 도발을 할 때마다 가장 강력한 제재 수단으로 중국이 송유관을 잠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중국이 북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히든 카드’라는 것이다.

중국은 2003년 2월 기술적인 이유를 들어 송유관을 잠근 적이 있다. 2002년 제2차 북핵 위기 이후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다. 미국은 다자 대화를 주장하고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 대화를 고집하자 중국이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결국은 북한은 2003년 4월 북‧미‧중 3자 회담과 그 뒤에 이어진 6자 회담에 참석했다.

중국은 송유관을 잠그지 않았지만 약속한 추가 지원을 취소하기도 했다. 북한은 1970년대 나진항을 러시아가 활용하도록 허락했다. 이에 중국은 불만이 많았다. 당시 중‧소 분쟁이 심하던 시기였다. 러시아의 나진항 진출은 중국에 러시아의 남진이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동해 출해에 지장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중국은 1980년 화궈펑 당 주석이 2년 전에 방북해 약속했던 원유 50만~70만t 지원을 취소했다. 게다가 북한으로 보내는 원유 가격도 인상했다. 이에 북한은 1981년부터 ‘원유 1% 절약령’을 발표하는 등 버티다가 결국 1984년 후야오방의 방북으로 청진항의 중국 사용을 허락했다.

중국은 ‘꼭 필요한 때’는 ‘히든 카드’를 사용한다. ‘꼭 필요한 때’의 기준은 한국‧미국‧일본이 아니라 중국이 결정한다. 중국은 ‘북한 비핵화’보다 ‘북한 안정’을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북한이 붕괴하거나 대량 난민이 발생해 국경 지역이 혼란에 빠질 가능성을 더 우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든 카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카드를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중국에 그 카드를 자주 사용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이독경이다.

글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더차이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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