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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염재호 칼럼

‘뷰카 시대’의 사회시스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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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설날도 지나 2023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윤석열 정부 2년 차를 맞아 우리나라가 새로운 도약을 할 기회다. 문명사의 대전환을 맞이한 요즘을 ‘뷰카 시대’라고 한다. 사회가 급변하고(volatile), 불확실하고(uncertain), 복잡하고(complex), 모호한(ambiguous) 상태라는 영어 첫 글자를 따서 뷰카(VUCA)라는 것이다. 21세기 사회는 확실히 20세기 사회와 다르다. 마치 금속 인쇄술의 등장으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가 촉발됐던 것처럼 디지털 전환은 인류의 문명을 급속히 바꿔나가고 있다. 20세기 사회시스템 안에 머물러 있으면 사회가 급변하고, 불확실하고, 복잡하고, 모호해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이런 뷰카의 시대를 어떻게 맞아야 하나?

윤석열 정부는 노동, 교육, 연금개혁을 3대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국회에서도 선거제 개편을 위시한 정치 개혁을 위한 초당적 모임이 출범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87년 민주화 체제를 넘어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만들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이념을 앞세운 이전투구의 이익 정치, 승자독식의 일방적 정치로 원칙과 절제의 정치 미학이 실종된 지 오래다.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도 사라지고 편 가르기와 극단적 팬덤 정치만 남았다. 이제 정치개혁 없이는 우리나라 미래가 암담할 뿐이다.

사회시스템 개혁은 뷰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필수 과제다. 새로운 사회시스템 구축이 미래를 위해 가야 할 길이라면 기득권의 저항을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를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급변·불확실·복잡·모호 시대 도래
문명사적 전환이자 비가역적 변화
기존 사회시스템 획기적 개편해야
정치·노동·교육·연금 개혁 필수적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20세기 사회시스템도 과학적으로 체계화했다. 일을 세부 전문화하는 미시적 공법이 발달했고, 이를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대량생산 시스템이 발전했다. 삶의 터전이 집에서 공장으로 바뀌었고, 제조업 노동직뿐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사무직도 늘어났다. 노동은 시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임금은 일한 시간을 기준으로 지불됐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비대칭적 권력관계 때문에 노동조합이 등장했고 20세기 노동시스템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21세기를 맞아 일의 특성은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했고, 정규직·호봉제·연공서열·종신고용 같은 경직된 노동시스템의 효율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됐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20세기에는 대량생산 체제에 걸맞은 교육의 효율성이 강조됐다. 현상을 보고 깨닫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교육보다 대형 강의실에서 전공지식을 앵무새처럼 외우면서 배웠다. 배운 지식을 회사에서 30년 정도 써먹고 은퇴하는 것이 20세기 교육과 직업의 사회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제 단순 지식을 반복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컴퓨터의 몫이 됐다. 심지어 20세기 직업의 85%가 소멸한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더 이상 형식지를 일방적으로 전수하는 교육방식은 유효하지 않다.

연금도 직장 은퇴 후의 삶을 보장해주기 위한 20세기 사회시스템이다. 하지만 저출산이 만연하고, 평균수명 70세에서 100세 시대로 생애주기가 획기적으로 바뀌면서 20세기식 연금제도는 부정합의 사회시스템이 되었다. 연금재정 고갈문제는 독일식 기업연금 제도와 같은 새로운 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

회사에서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협업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20세기 직무관리의 규칙과 기준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글로벌 기업들은 직원들의 업무 시간보다는 업무의 질을 평가한다. 재택근무나 자율근무가 보편적 시스템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CEO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와 글로벌 경영전문대학원 인시아드(INSEAD)의 에린 마이어(Erin Meyer) 교수의 저서 『규칙 없음』을 보면 넷플릭스에서는 대량생산 체제에서 효율적으로 직원을 관리하던 관료제화된 규정을 모두 없애고 자율적으로 일하게 한다. 출퇴근뿐만 아니라 심지어 휴가 시기나 기간도 직원들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많은 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보다 인재 밀도를 강조하는 헤이스팅스는 직원들을 모두 프로페셔널로 인정해서 근무 장소나 시간보다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일의 결과만 평가한다. 이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뷰카 시대를 성공적으로 맞을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재택근무를 권장하던 기업들이 다시 직원들을 출근시킨다고 한다. 이는 아직도 관리자들이 시간을 중심으로 일을 관리하고 대면으로 업무를 아무 때나 지시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이 더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20세기형 관리자의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문제다. 21세기는 시키는 일만 하는 노동이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일을 자율적으로 하고 업무 성과로 평가받는 프로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이제 선진사회로 도약하기 위해 20세기 사회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할 때가 됐다. 비가역적 변화의 흐름에 저항하면 뷰카의 시대에 살아남기 어렵다. 새해에는 정부와 기업 모두 21세기 뷰카시대에 걸맞은 사회시스템을 구축하고 우리는 모두 이를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