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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어정쩡한 전당대회와 설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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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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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당에서 전당대회의 용도는 당 대표나 대선후보 선출이다. 대표를 뽑을 때 최고위원으로 불리는 간부를 함께 선발한다. 양대 정당에서 투표는 대의원과 당원이 하고 거기에 일반인 여론조사를 반영하는 다소 복잡한 방식으로 전개됐는데, 국민의힘은 3월로 예정된 전당대회에서 여론조사를 빼기로 했다.

정책 수렴 없는 한국식 당대회 #새해 맞이와는 거리 있는 명절 #명목과 현실 부정합 언제까지?

전당대회가 대선후보나 당 대표를 뽑는 선거 중심인 것이 국제적으로 보편적이지는 않다. 정당정치의 종주국인 영국의 전당대회는 거대한 토론회다.

지난해 9월 리버풀에서 열린 영국 노동당 전당대회의 모습. 영국 노동당 홈페이지

지난해 9월 리버풀에서 열린 영국 노동당 전당대회의 모습. 영국 노동당 홈페이지

영국 보수당과 노동당의 전당대회는 매년 가을에 지방 도시에서 통상 나흘간 진행된다. 대의원·당직자·의원·기자 등 1만 명가량의 사람이 모인다. 당 대표를 뽑는 투표는 없다. 그것은 다른 때에 별도의 절차로 한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서 무엇을 할까.

말을 한다. 당이 나아갈 길을 놓고 토론·연설·논쟁을 하고, BBC가 주요 장면을 중계한다. 조세·복지·의료·교육·환경·이민자가 최근의 주요 소재다. 분야별로 참가자들이 모여 당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지지를 한다. 대의원들은 주로 자기가 거주하는 지역의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며 당 정책의 문제를 들춘다. 현역 의원들은 당의 주류 세력을 비판하거나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이 행사를 위해 정당은 서너 달 동안 준비한다. 전국에서 지역별로 의견 수렴을 한다. 그것이 몇 단계에 걸쳐 큰 단위로 취합된다. 당이 고쳐야 할 것, 새로 추진해야 할 것이 그렇게 제시된다. 그야말로 풀뿌리 민주주의 정당정치다. 각 정당은 전당대회의 토론·논쟁을 통해 당원들의 생각과 의지를 확인한 뒤 ‘매니페스토’라고 불리는 정책 공약집을 낸다. 간호사 5만 명 증원, 정부 지출 5% 삭감, 최고 소득세율 45% 유지 같은 구체적 정책이 그곳에 담긴다. 당이 갈 길을 정하는 곳이 전당대회다.

미국의 전당대회는 4년마다 대선 전에 열린다. 중앙당 조직이 없으니 대표를 뽑을 일이 없다. 행사의 핵심은 이미 선출된 대선후보를 승인하고 후보 수락 연설을 듣는 것이다. 당의 축제다. 독일의 전당대회에선 우리와 비슷하게 당 대표 선출이 이뤄진다. 다른 점은 대연정 추진, 원전 폐쇄 등의 당론이 그곳에서 대의원 투표로 정해지기도 한다는 점이다.

대통령과 행정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므로 우리 정당의 정책적 기능은 내각책임제 국가에 비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모든 당원의 뜻을 모으고 받든다는 전당대회가 한국의 양대 정당에서 갑론을박 없는 일사불란함을 강조하는 특이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이럴 거면 왜 굳이 전당대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나. 당 지도부 선출 대회라고 불러도 충분하지 않나.

명목과 실제가 부합하지 않아 어정쩡한 게 또 하나 있다. 설날이다. 새로운 1년의 시작을 기쁘게 맞으면서 가족과 주변 사람의 복을 기원한다는 취지인데 음력을 따르다 보니 새해가 한참 지난 뒤에 맞게 된다. 양력 2월 중순에 "새해 복"을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대한제국 시절과 일제 강점기,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거치며 정부가 양력 1월 1일로 설을 통일하려고 했으나 다수 국민이 음력 설에 차례를 지내고 세배하는 전통을 고수했고, 양력설은 일제의 잔재라는 주장이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그 결과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에 음력 설이 정식으로 부활했다.

한 세대가 지난 요즘 음력 설 폐지론을 종종 듣는다. 설은 새해 첫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말연시에 설 연휴만큼을 휴일로 지정하자고 한다. 조상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차례를 반드시 음력 설에 지내야 하느냐, 음력 설은 중국에서 유래한 풍습이 아니냐는 말도 한다.

한국식 전당대회가 당장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새해 첫날과 설날의 통일도 현재로선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주장이다. 그래도 꾸준히 얘기해 볼 문제다. 더 나은 제도는 현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생각에서 비롯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