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토로하니 전출…‘극단선택 조짐’ 눈치 못채는 군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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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 고통받는 병사들

김민성(가명·당시 19세)씨가 입대(2020년 12월 14일) 6개월여 만에 차디찬 시신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입대 3개월 전 정신의학과에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진단을 받고 약물치료를 받아왔다. 입대할 때 군에 ‘ADHD약을 복용한다’는 소견서를 냈지만, ‘입영 대상자’란 판정을 뒤집을 순 없었다. 김씨는 입영 후 복무적합도 검사에선 양호 판정이 나왔지만, 실제 군 생활은 고통이었다. 몇 차례 극단적 시도를 실패한 뒤 그는 사격훈련 중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 박모씨는 “민성이는 입대해선 안 되는 상태였다”며 “아들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울먹였다.

“아들 지켜주지 못한 국가에 책임”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치료를 받다 입대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고 김민성(가명)씨의 군번줄과 사망확인서. [사진 밀실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치료를 받다 입대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고 김민성(가명)씨의 군번줄과 사망확인서. [사진 밀실팀]

병무청 관계자는 “부적합자의 입대를 최대한 막기 위해 2021년 8월부터 입대 전 한 번 더 입영판정검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거름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얼핏 촘촘해 보이지만, 여전히 빈틈이 많다는 것이다. 2019년 8월 5일 부대에서 극단 선택을 한 한모(사망 당시 20세)씨도 입대 전 우울증으로 7개월간 정신과 진료를 11차례 받았다. 입대를 두려워한 한씨는 평소 ‘자살’을 입에 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병역판정검사에선 현역 입영 대상자로 분류됐다. 2019년 5월 병무청 복무적합도 검사에서 ‘정밀관찰 요구’ 진단이 내려졌지만, 최종 판정이 바뀌진 않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입영 대상자들의 정신적 이상 징후를 걸러내는 거름망 부실뿐 아니라 병사들의 정신건강을 뒷받침하는 안전망의 부실도 심각하다. 하민우(가명·사망 당시 21세)씨는 2021년 여름 전역 전 휴가를 보름여 앞두고 부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일병 때부터 1년여간 또래상담병을 맡아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후임병들을 상담해오면서 가족에게 이따금 “우울증에 전염되는 것 같다. 힘들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그러던 2021년 5월 후임을 괴롭혔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우울감은 증폭됐다. 하씨는 “억울하다.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고 호소했지만, 부대는 치료가 아닌 전출을 택했다. 낙심한 하씨는 전출 6일 만인 2021년 6월 8일 삶을 내려놓았다. 군 경찰은 “군이 하씨 가족에게 아들의 전출 사실과 그 이유를 전혀 통보하지 않아 하씨와 가족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점, 범죄자로 몰렸다는 억울함, 부대의 병력관리가 부실한 점, 혼자 남겨졌다는 외로움 등이 사망 원인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정신과 치료를 받겠다고 마음먹었던 하씨를 지켜줄 안전망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최근 병역처분변경(현역복무 부적합 전역) 사유에선 ‘정신질환·복무 부적응’이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안규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확보한 병무청 통계에 따르면 2018년 병역처분이 바뀐 6116명 중 4786명(78.3%)의 사유가 ‘정신질환·복무 부적응’이었다. 정신질환·복무 부적응으로 인한 병역처분 변경 비율은 79.5%(2019년), 81.3%(2020년), 82.6%(2021년), 84.0%(2022년 6월 기준)로 꾸준히 증가세다. 군이 병역처분 변경 제도 외에도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을 통한 상담, 병원 치료 등을 병행 운용하고는 있지만, 역부족이란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병영생활 전문상담관은 600명뿐

또래 상담병으로서 후임병 상담 일을 했다가 목숨을 끊은 고 하민우(가명)씨의 유골함. [사진 밀실팀]

또래 상담병으로서 후임병 상담 일을 했다가 목숨을 끊은 고 하민우(가명)씨의 유골함. [사진 밀실팀]

전문가들은 병사들의 자살 징후가 조기에 발견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국군수도병원에서 3년 근무)는 “군이 자살예방 교육을 하면서 위험 신호를 발견하는 ‘눈’을 곳곳에 심으려 노력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26일 ‘복무 부적합’ 판정으로 제대한 이모(22)씨는 정확한 진단이 어려운 양극성 정동장애로 여전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2021년 1월 5일 입대한 이씨는 2월 9일 자대에 전입한 뒤 선임 A씨의 가혹 행위를 겪으면서 우울증세에 시달렸다. A씨는 훈련 중 손목을 다친 이씨에게 보호대를 착용하지 못하게 하고 욕설과 인신공격을 거듭했다고 한다. 이씨가 2021년 5월 중대장과의 면담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렸지만 조치는 없었다고 한다. 결국 원치 않던 손목 수술까지 하게 된 이씨는 휴가 중 다섯 차례에 걸쳐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다. 이씨의 악몽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씨의 아버지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직 정상 생활이 어려운 상태”라고 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군에서 9년간 근무한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군에선 자살예방 교육 프로그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병영생활 전문상담관도 600여 명뿐이라 전 부대를 아우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3년간 군의관으로 근무한 김재옥 삼성 마음숲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몇 개월씩 진료 예약이 몰려 있어 군의관도 병사 1명을 진료하는 데 몇 분 정도밖에 쓸 수 없는 환경이다”고 말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 내 정신과 전문의를 확보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협의하고 있다. 군 의료기관을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비해 민간병원 진료비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국군수도병원에서 9년간 일한 이상돈 서울이룸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정신건강 통합관리체계를 도입해 정신질환 예방, 자살위기 개입, 고위험군 선별, 사례관리가 유기적으로 이뤄지게 해야 한다”며 “군 외부전문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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