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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달 우리 아가, 2명 살리고 떠났어요" 장기기증 유족들 '깊은 삶'

중앙일보

입력

지난 20일 승준이네 가족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로부터 작은 설 선물을 받았다. 새로 ‘도너패밀리’가 된 유족들에게 주는 ‘생명나눔의 별’이 포함된 선물 꾸러미였다.

승준이는 지난해 7월 또래의 영아 1명과 15살 청소년 1명에게 신장과 간을 기증하고 떠났다. 건강했던 아이는 갑작스레 호흡 곤란을 겪다가 수분 만에 뇌사 상태에 빠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은 ‘영아 돌연사 증후군’이라고 불렸다. 2월생 승준이는 그렇게 첫 설을 맞지 못한 채 5개월 만에 눈을 감았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지난 20일 승준이네 가족에게 신규 도너패밀리(뇌사자 장기기증자 유족)에게 주는 크리스탈패 ‘생명 나눔의 별’과 소정의 설 선물을 전달했다. 사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는 지난 20일 승준이네 가족에게 신규 도너패밀리(뇌사자 장기기증자 유족)에게 주는 크리스탈패 ‘생명 나눔의 별’과 소정의 설 선물을 전달했다. 사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서둘러 하늘나라로 간 둘째 아들을 떠올리는 승준이 엄마 윤모(41)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지금도 꼬물꼬물하던 승준이 모습이 선해요. 참 짧은 삶이었지만… 아픈 아이들 살리고 간 우리 승준이는 엄마나 아빠보다 고귀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생후 5개월이던 2022년 7월 환아 2명에게 신장과 간을 기증하고 떠난 故이승준군. 사진 아버지 이모씨 제공

생후 5개월이던 2022년 7월 환아 2명에게 신장과 간을 기증하고 떠난 故이승준군. 사진 아버지 이모씨 제공

승준이 아빠 이모(45)씨는 “아내와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아이가 아파 보니 살 수 있는 아이는 한 명이라도 살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며 “부모는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 떠올리며 승준이의 장기기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장기기증으로 6명을 살리고 떠난 故정문규씨가 2009년 경찰대학 입학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아버지 정찬욱씨 제공

장기기증으로 6명을 살리고 떠난 故정문규씨가 2009년 경찰대학 입학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아버지 정찬욱씨 제공

장기기증으로 6명을 살리고 떠난 정문규(사망 당시 21세)씨의 아버지 정찬욱(59)씨는 지난 21일 인천 연안부두 앞바다를 찾았다. 설을 맞아 해양장 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문규씨는 경찰대 재학 중이던 2011년 1월 25일 뇌사 판정을 받고 총 6명에게 신장·간·심장·각막을 기증했다. 아버지는 부표 위에서 “너무도 좋은 술 친구”였던 큰아들에게 술과 국화를 뿌려줬다.

故정문규씨 가족이 설날을 맞아 지난 21일 성묘 차 인천 연안부두를 찾았다. 아버지는 먼저 간 아들에게 “물결 흐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세계 어디든 다니라”고 말을 건넸다. 사진 아버지 정찬욱씨 제공

故정문규씨 가족이 설날을 맞아 지난 21일 성묘 차 인천 연안부두를 찾았다. 아버지는 먼저 간 아들에게 “물결 흐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세계 어디든 다니라”고 말을 건넸다. 사진 아버지 정찬욱씨 제공

정찬욱씨는 가슴에 묻은 아들을 “범죄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친구들보다 체격이 작아도 리더십이 있는 성격이었다”며 “어릴 때부터 봉사도 많이 다니고, 엄마 아빠를 많이 좋아하고 존경해준 자랑스러운 아이”로 회상했다. 정씨는 “다 커서 결혼한다는 아들 친구·동기들 청첩장을 받을 때나, 기일 근처인 설날이 되면 참 많이 그립다”며 “그래도 여섯 분의 숨결 속에 문규가 남아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씨 가족은 온 식구가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다.

지난 11일 서울 중구 남창동 대도종합상가 ‘남산상회’에서 만난 정찬욱씨가 큰아들인 故정문규씨 사진을 들고 있다. 정씨는 20년 넘게 이곳에서 일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그는 “우리 아이의 일부가 여섯 분에게 가서 기능하고 있으니, 어딘가에 숨결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지난 11일 서울 중구 남창동 대도종합상가 ‘남산상회’에서 만난 정찬욱씨가 큰아들인 故정문규씨 사진을 들고 있다. 정씨는 20년 넘게 이곳에서 일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그는 “우리 아이의 일부가 여섯 분에게 가서 기능하고 있으니, 어딘가에 숨결이 남아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장기기증 희망 신청으로 새해에 의미를 더 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3일 희망등록을 마친 권은주(51)씨는 “가족 2명이 신장 이식을 통해 새 삶을 얻었다”며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나. 내겐 최소한의 선행”이라고 말했다. 지난 5일에 등록한 황규찬(16)군은 “만 16세 생일이 지나서 곧장 신청했다”며 “절차도 간단하고 간절한 분들께 보탬이 되는데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후 장기기증을 약속하는 사람은 갈수록 줄고 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지난 22일 설립 32주년을 맞아 중앙일보에 공개한 ‘장기기증 현황 통계’에 따르면, 국내 장기기증 희망등록자는 2009년 18만3369명으로 정점을 찍고 지난해 6만8418명까지 내려왔다.

연간 등록자는 2015년부터 10만명을 밑돌기 시작했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2’ 영향으로 반짝 증가세를 보였던 2021년에도 8만8865명에 그쳤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가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 장기기증 서약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감소세를 바꾸진 못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반면 장기기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증가했다. 2000년 5343명이었던 연간 장기이식 대기자는 매년 수천 명씩 늘어 지난해 4만9765명을 기록했다. 김동엽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상임이사는 “코로나19 여파로 장기기증 운동이 많이 위축돼 이식 대기자들에겐 혹독한 겨울이었다”며 “새해에는 장기기증을 약속하는 분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장기기증 희망등록은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 한국장기조직기증원 홈페이지 등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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