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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년 추억보다 중한 이것...집을 비우니 숨 쉴 구멍이 생겼다 [퍼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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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최창연의 원룸일기(14)

지난주 주말, 결혼식에 다녀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선본 남자와 연락은 계속하고 있냐고, 대체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다그쳤다.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은 딸을 둔 엄마가 아직 ‘해치우지 못한’ 딸에 대해 한소리 들은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래도 주말 드라마를 보며 느긋하게 쉬던 나는 그야말로 난데없이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통화를 끝내고 빨래를 걷으러 베란다로 나가자, 집에서 보낸 배추와 사과, 가을 무가 발에 걸렸다. 작은 베란다에는 뜯지도 않은 채로 방치된 상자(캔들 워머와 스탠드, 발 마사지기)와 부모님이 보내준 채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물건 하나를 잘못 꺼내면 주변의 것들도 우르르 쏟아졌다.

아빠가 수확해 보낸 배추가 상했는지 바닥에 물이 고여 있었다.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닦다 보니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베란다 문을 닫으면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엉망인 모습, 이게 내 진짜 모습은 아닐까? 정리되지 않은 공간이 나의 진짜 모습처럼 느껴졌다.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지친 날에 집에 오면 죄책감이 들었다.

[그림 최창연]

[그림 최창연]

“그냥 버리면 되지 않아? 어차피 안 쓰잖아.”

잘 버리지 못하는 나를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동생은 새로 산 화장품이 피부에 맞지 않으면 버리거나 나눠주고,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억지로 먹지 않는다. 그에 반해 나는 피부에 안 맞는 화장품이라도 손에 바르자며 서랍에 넣어둔다. 먹지 않은 음식도 일단은 냉동실에 얼린다. 서랍에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이 많고, 냉동실에 까만 봉지들이 쌓여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버리고 정리하는 것을 배워야 겨우 해내는 사람이 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고민하다가 전문 정리 컨설턴트가 진행하는 정리 트레이닝을 신청했다. 여러 공간으로 나누어 신청할 수 있는데, 가장 엉망인 ‘주방 정리’를 신청했다. 프로그램은 3주 동안 진행되고 물건들을 버리고 재배치하고 청소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트레이닝 첫 주에는 물건을 비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트레이너가 매일 정해주는 아이템을 비웠다. 첫째 날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 두고도 안 먹었던 식품들을 정리했다. 둘째 날에는 코팅이 벗겨진 냄비를 버렸다. 셋째 날에는 안 쓰는 식기들을, 넷째 날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버렸다. 다섯째 날에는 쓰지 않는 튀김기와 전기냄비를 버렸다.

거의 매일 20ℓ 종량제 봉투 하나가 가득 찼다. 오래된 사기그릇은 불연성 마대자루에,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들은 중고 마켓에 싼값에 올리거나 무료 나눔을 했다. 소형가전은 인터넷으로 소형 폐기물 배출을 신청했다.

물건을 버리기 힘들 때마다 트레이너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비우는 게, 결국 앞으로 비울 일을 줄이는 일이에요’. 물건을 버리면서 받는 충격이 앞으로의 삶을 바꾼다는 뜻이다. 크게 느끼는 죄책감과 후회가 소비에 대한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한가득 버려지는 쓰레기를 보며 지구에 대한 미안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작은 집 곳곳에 박혀있던 물건들의 양이 어마어마해 버릴 때마다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그걸 본 친구들이 연락 왔다.

“설마 저 초콜릿 내가 여행 갔다가 선물로 줬던 거? 그게 언제 적이야?”
“아니, 저 티백 이제 그만 보내줘요.”
“우와. (17년 전의) 저 컵을 지금 보게 될 줄이야. 나 언제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안 나.”

단체 컵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 ‘이거 기억나?’라며 이야기를 하다 깨달았다. 다들 앞을 향해 걸어가는데, 나만 추억을 들고 그 자리에 남아 있구나. 이가 나간 컵을 왜 나는 여태 가지고 있었을까. 싱크대 구석에 넣어둔다고 추억이 그대로 보관되는 것도 아닌데. 지나간 일을 잡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룸에서는 정리가 어렵다는 말이 맞기도하고 틀리기도 하다. 좁은 공간에는 물건이 조금만 많아져도 금세 지저분해졌다. 하지만 그보다는 좁다는 핑계로 대충 물건들을 쑤셔 넣은 까닭이 더 크다. 마치 여기는 금방 떠날 곳인 것처럼. 엄마가 나의 싱글 생활을 인정하지 못하듯, 나도 지금의 생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 내보낸 다음, 식탁 의자에 기대앉아 싱크대 찬장을 다시 바라보았다. 비우기만 했을 뿐인데도,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숨 쉴 구멍이 생긴다는 표현이 이해되었다.

나에게 비우는 일은, 결국 과거를 잘 매듭짓고,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는 일에 가깝다. 그러니 봄이 오기 전까지 한동안 버리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봄에는 새로운 공간에, 새로운 기운이 들어올 것이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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