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불 지긋지긋…이곳의 삶 말로 다 못해" 잿더미 구룡마을 눈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일 오전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발생한 화재는 약 4시간 동안 44가구를 태우고 나서야 완전히 진화됐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소방대원과 경찰 등의 빠른 대처 덕분이지만, 이웃들이 초기에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영하의 날씨에 속옷 바람으로 뛰어다니며 상황을 알린 주민들의 활약도 있었다.

불은 이 날 오전 6시 20분쯤 구룡마을 4지구의 한 집 안에서 시작됐다. 이웃한 집들 대부분이 합판과 비닐 등을 덧대놓은 상태라 불은 빠르게 옮겨붙었다. 화재 사실을 처음 인지한 건 부인이 병원에 입원해 불이 시작된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던 70대 후반 A씨였다. 경찰과 소방 등에 따르면 A씨는 옷을 챙겨 입을 경황이 없어 내복만 입은 채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곤 주변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리고, 밖으로 대피하라고 알렸다고 한다. 또 A씨가 문을 두드려 밖으로 나온 주민들 역시 다시 이웃집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깨운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로 집이 불탄 주민 이모(63)씨는 “아침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알려줘서 밖으로 대피했다”며 “급하게 대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양말도 못 신고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인 경찰 관계자는 “대부분 판잣집이라 불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옮겨붙어 큰불이 됐는데, 다행히 불이 시작된 집 주변의 주민들이 빨리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했다.

“애들 아빠 산소에 가려 했는데…” 호텔에서 설 맞는 주민들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해 44가구가 불에 타고 62명이 집을 떠나 임시 숙소로 이동했다. 김민정 기자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해 44가구가 불에 타고 62명이 집을 떠나 임시 숙소로 이동했다. 김민정 기자

다치거나 숨진 사람은 없었지만, 설 연휴 전날 화재로 보금자리를 잃은 구룡마을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집이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진 이모(70)씨는 “설 연휴에 애들 아빠 산소에 가기로 했는데…. 불이 나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35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구룡마을로 이사 온 그는 마을을 ‘사람들이 정이 많은 동네’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낡은 집과 전기시설 등에는 좀처럼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씨는 “내가 사는 곳도 30년 전쯤인가 불이 나서 다시 지은 곳인데, 이번에 또 불에 탔다. 침통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시간 자고 깨고, 또 한 시간 자고… 제대로 잠을 못 잔다. 우리 집 앞에 전기선이 합선돼 불이 붙어서 소방대원들이 출동해 끈 적도 있다. 마을 전체가 열악한데, 주민들이 고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화재로 오래전부터 모아 온 자녀들 사진부터 세간살이까지 모든 걸 잃었다. 그러나 넋 놓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마을 반장인 이씨는 4지구에서 함께 살아온 이웃들을 챙기느라 오전 내내 바쁘게 움직였다. 불이 난 집에 사는 주민 명단을 손에 쥐고, 이웃 한명 한명에게 전화를 걸어 안전을 확인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소방당국이 동원한 포크레인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소방당국이 동원한 포크레인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불이 난 4지구에는 90여 가구가 넘게 살고 있었다. 이 중 집이 불에 타 돌아갈 수 없게 된 이재민이 62명이다. 이들 대부분 내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를 호텔 등 임시 숙소에서 맞이해야 한다. 30년째 구룡마을에 거주 중인 한 주민은 “화재로 집이 다 타니 스스로에게도 화가 나고 침통하다”며 “판자촌 삶 자체가 불안하고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또 “설 연휴를 집이 아닌 호텔에서 보내야 하니 답답하고 막막하다. 나중엔 친척들이나 자식들 집에 가야 할 텐데 미안해서 부탁하기도 어렵다”며 “생활 자체가 불에 타버렸다”고 했다. 주민 조태천(70)씨도 “집이 없으니 설 연휴를 생각할 여유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강남구청에서 지정해준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문제는 이 같은 비극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침울한 표정으로 화재 복구 현장을 오가던 주민들은 “불이 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1975년부터 구룡마을 4지구에서 살았다는 박순식(78)씨는 “여기 사는 동안 큰 불만 여섯 번을 겪었다”며 “여기서 사는 삶이 어떤 건지 말로 다 못 한다”고 말했다.

20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화재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20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화재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다른 주민 역시 “전기선이 노후화해 스파크가 종종 튀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 연로하고 대부분 연탄보일러를 사용해서 화재에 더 취약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올해는 수해도 겪었다. 지난해 8월 강남 지역을 덮친 폭우로 큰 피해를 보고, 100여명이 집을 떠나 임시 대피소에서 생활했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 추석도 대피소에서 맞았다.

4지구 주민 이기순(89)씨는 “개인적인 자료이나 책도 다 사라지고, 옷도 지금 입고 나온 한 벌밖에 없다”며 “공동체가 사라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