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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서소문 포럼

외교안보 발언의 나비효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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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 장병들을 만난 자리에서 “UAE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 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즉각 파문을 일으켰다. 나세르 칸아니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페르시아만 국가들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긍정적 관계 개선에 대해 전적으로 모르는 발언”이라며 “이란 외교부가 한국 정부의 최근 스탠스, 특히 이란과 UAE의 관계에 대한 외교적으로 부적절한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평가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한국 외교부는 “이란과의 지속적 관계 발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의지는 변함없이 확고하다”고 해명해야 했다.

윤 대통령이 이란을 UAE의 적으로 규정한 것 자체가 사실과 다르다. 이란은 중동 지역 패권을 추구하고 UAE와 페르시아만 3개 도서 영유권 분쟁을 벌이며 관계가 껄끄럽지만 두바이 체류 이란인이 60만 명으로 추산되는 등 교류가 활발하다. 외교부 ‘2023 UAE 개황’에 따르면 UAE는 “이란을 최대의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하면서도 실리적인 경제 관계를 구축하며 양국 관계를 관리해 나가는 중”이다. 서방의 제재 속에 이란은 수입의 68%를 UAE에 의존하고, UAE의 이란 수출액은 지난해 120억 달러(약 15조원)를 넘어설 것으로 보이는 등 경제적으로 밀접하다.

“UAE의 적은 이란” 외교 파장
상대국 배려 없고 사실도 아냐
지도자의 말은 절제·정제돼야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에 파병한 아크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는 윤석열 대통령. [뉴시스]

지난 15일 아랍에미리트에 파병한 아크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하는 윤석열 대통령. [뉴시스]

윤 대통령의 발언은 UAE 순방 성과를 스스로 깎아내렸다. UAE는 이번에 원자력·에너지·투자·방위산업 등의 분야에서 한국에 300억 달러(약 37조원)의 투자 방침을 밝혔다. UAE의 통 큰 투자는 세계적 경기 부진으로 위축된 한국 경제에 활력소가 될 전망이다. 엄청난 순방 성과가 한순간의 말실수에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발언에 한국과 이란 관계는 더욱 냉랭해졌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으로 인한 미국·유럽연합(EU) 등의 경제 제재에 한국도 동참하면서 한국과 이란의 직접 교역은 미미하다. 그러나 이란은 한국의 중동산 석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장악하고 있다. 이란과의 관계 악화는 석유 수입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또 서방의 제재가 풀리면 이란과의 경제 교류를 재개해야 하는데 이란 내에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깊어지면 악영향을 받게 된다.

윤 대통령의 외교 실언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뉴욕에서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짧은 회담 이후 회의장을 나서면서 비속어가 섞인 말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윤 대통령은 지난 11일 외교·국방부 업무보고에선 “더 (북핵) 문제가 심각해지면 대한민국에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우리 자신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가 심각해지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전술핵 배치와 핵무장을 공개적으로 거론해 파문이 일었다.

전술핵 배치나 독자 핵무장은 한·미가 공유하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미국 행정부의 핵 비확산 기조와 배치돼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미국의 확장억제(핵우산) 강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한·미 정부의 입장이다. 원론적 발언이라고 해도 한국이 독자 핵무기 개발에 나설 수 있다는 국제사회의 오해를 불러와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말은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절제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중국발 입국자에 대한 검역 강화도 과한 측면이 있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중국발 입국자에 대해 입국 전후 유전자증폭(PCR) 검사뿐 아니라 단기 비자 발급 제한 등의 조치를 내놨다. 중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지난 10일 한국·일본에 대해 단기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 중국은 주요국 중 유일하게 단기 비자 발급을 제한한 한국과, 가장 먼저 중국에 대한 검역 강화 조치를 발표한 일본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한·중은 서로를 향해 정치적 의도가 개입됐다고 주장한다. 방역을 둘러싼 한·중의 공방에 중국 진출 기업인·교민이 피해를 보고 있다. 씀씀이가 큰 중국인 관광객 입국이 막히며 관광·면세산업의 타격이 예상된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경제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줄 전망이다.

윤 대통령은 검찰에서 경력을 쌓아 외교안보 경험이 적다. 참모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발언에 신중해야 한다. 특히 외교안보는 상대국이 있는 만큼 발언의 파장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외교안보에선 침묵이 말보다 나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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