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사의재(四宜齋)와 골경신(骨鯁臣)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위문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위문희 정치부 기자

위문희 정치부 기자

보수주인(保授主人)이란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유배 온 죄인의 거처와 음식을 마련하고, 죄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던 책임자다.

1801년 39세 나이로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은 머물 집을 찾아봤으나 누구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주막집 노파의 도움으로 겨우 행랑채 한 칸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주막집 노파가 보수주인이었다. 정약용은 그곳에 ‘사의재(四宜齋)’ 편액을 내걸고 4년을 보냈다.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란 뜻이다. 다산은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다짐했다. 귀양살이 온 정약용의 단단한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 사의재가 소환됐다. 문재인 정부 당시 고위 관료와 참모진으로 구성된 정책포럼 성격의 ‘포럼 사의재’가 지난 18일 출범했다. 사의재란 이름은 더불어민주당 내 친문계 3선 좌장인 도종환 의원이 제안했다. 청와대를 연상케 하는 ‘정책포럼 광화’와 ‘북악’이란 이름도 제시됐지만 최종적으로 사의재가 낙점됐다. 왜 사의재인가.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을 ‘총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난다’는 뜻의 풍운지회(風雲之會)에 비교한다. 정약용이 유배에 처하게 된 것은 주군이었던 정조가 1800년 승하한 뒤다. 그는 강진에서 18년간 공부하며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걸출한 개혁서를 완성했다. 도 의원은 사의재란 이름을 제안한 취지를 “권력을 잃었지만 성찰하고, 그리고 개혁의 꿈을 버리지 말고 진중하게 미래를 준비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정약용의 뜻이 어찌 사의재에만 머물겠는가. 지난해 정약용 일대기인 『사암 정약용 전기』를 펴낸 정해렴 전 창비 대표는 인간 정약용의 정신으로 ‘골경신(骨鯁臣))’을 꼽았다. ‘이에 씹히는 뼈와 목에 걸리는 가시와 같은 신하’라는 뜻이다. 그는 “다산은 무조건 충성만 하는 게 아니라 임금의 잘못도 지적해 바른 군주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골경신이 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사의재라는 정약용의 당호(堂號·집에 사는 사람의 호) 안에 갇히기 전에 골경신의 덕목부터 먼저 살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