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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신체검사 1급인데, 경찰 채용 탈락" 꿈 잃은 색약자의 눈물

중앙일보

입력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등장인물 전재준(박성훈)은 빨간 렌즈를 착용한다. 색각 이상을 교정해주는 ‘크로마젠 렌즈’로, 그가 가진 적녹 색약을 교정하기 위해서다. 그의 딸도 색약을 물려받아 신호등 색깔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게 극중 설정이다. 친구의 검은색 스타킹을 분홍색 스타킹으로 착각하거나, 벚꽃을 분홍색으로 칠하지 않아 지적을 받는 장면도 나온다.

그러나 대다수 색약자들은 “색약자라서 색 구분이 불편했던 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한다. 이는 국내 색각이상자(색약·색맹을 포괄하는 개념) 가운데 색을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완전색맹이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국내 남성의 5.9%, 여성의 0.4%가 색각이상인데, 완전 색맹은 0.005%다. 이에 다수 색약자들은 오히려 일상에서 겪는 채용 등 사회적 제약이 더 큰 장벽으로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군 신체검사 1급인데, 색약이라고 경찰 채용 탈락”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적녹색약을 가진 걸로 나오는 인물 전재준. 유튜브 캡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적녹색약을 가진 걸로 나오는 인물 전재준. 유튜브 캡처

2018년 경찰공무원 채용 과정에서 색약 판정을 받아 탈락한 최모(32)씨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2년간 독서실을 오가며 필사적으로 공부해 필기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신체검사 단계를 넘지 못했다. 운전은 물론 스타크래프트나 피파 같은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등 색약으로 인해서 불편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최씨의 충격은 더 컸다고 한다.

최씨는 “8~9개월간은 방황했던 것 같다. ‘내 인생 어떻게 해야 하지’ 싶었다”며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말도 안되는 이 색약 때문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최씨는 지난해 교정직 공무원에 합격했지만 아직도 주변에서 경찰이 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아리다고 한다.

경찰공무원 임용령 시행규칙은 “색각 이상(약도 색약은 제외)이 아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원래는 ‘색맹’에 대해서만 취업을 제한해 왔지만, 지난 1999년 “색맹(색약을 포함한다)이 아니어야 한다”고 규정하며 색약까지 취업을 제한했다. 국가인권위가 “규정의 강화가 뚜렷한 근거없이 이뤄졌다”는 용역보고서를 인용해 2009년~2020년 4차례에 걸쳐 “‘색각이상’만을 근거로 채용을 제한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권고했지만, 경찰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색약 판정을 받아 경찰 임용에 실패한 이들은 불합리한 제한이라고 입을 모았다. 최씨는 “색약이라서 경찰을 할 수 없다면 군대도 가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피아식별을 못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총을 맡기나”라며 “총을 잘 쏴서 포상휴가도 받고, 불편 겪은 적 한 번 없이 만기전역했다”고 말했다. 중도 색약으로 임용되지 못한 윤희상(25)씨도 “군대 신체검사도 1급을 받았다. 일상적으로 불편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당연히 약도 색약일거라고 생각했고, 이렇게 발목이 붙잡힐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굳이 색약을 뽑을 필요 있나는 생각 때문에…”

 색약은 눈의 망막에 있는 원뿔세포의 개수가 모자라거나 기능이 떨어지면서 발생한다. 색각이상은 성염색체 관련 열성유전이다. X염색체의 색각유전자에 이상이 있을 때 남자는 증상이 나타나는 색각이상자가 되고 여자들은 보인자가 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색약은 눈의 망막에 있는 원뿔세포의 개수가 모자라거나 기능이 떨어지면서 발생한다. 색각이상은 성염색체 관련 열성유전이다. X염색체의 색각유전자에 이상이 있을 때 남자는 증상이 나타나는 색각이상자가 되고 여자들은 보인자가 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경찰의 채용 제한은 군에서 색약자 채용 제한이 완화돼 온 것과도 대조적이다. 공군은 지난해 3월 색약자가 지원할 수 있는 병과를 4개 병과에서 21개 병과로 확대했다. 색약자라도 육군은 189개 중 104개, 해군은 29개 중 27개 병과에 지원할 수 있다. 소방청은 지난 2005년부터 녹색약의 채용을 허용했고, 2016년에는 경미한 적색약자는 선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규정을 완화해 왔다. 서울의 한 안과전문의는 “색약이라고 해도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굳이 색약을 뽑을 필요가 있냐’는 생각 때문에 색약자들의 기회가 박탈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공무원은 범인을 추격해야 하고 현장에서 순간적으로 장비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강도나 중도 색신 이상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며 “단순히 추측에 의한 것은 아니고, 전문가 의견과 임상시험을 거친 결과”라고 설명했다. 다만 “최근 국민제안이 올라오는 등 관련 요구가 계속되고 있고 임상시험도 최신의 것은 아니어서 재검토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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