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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노총 압수수색 간부들, 북 지령따른 혐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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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가정보원과 경찰이 18일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4명의 자택과 이들의 근무지인 서울 정동 민주노총 본부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방첩당국은 경기도 수원, 광주광역시, 전남, 제주 등 전국 10곳 안팎의 사무실과 주거지·차량, 영등포구 보건의료노조 사무실에 대해서도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방첩당국은 압수수색 대상 중 일부가 중국으로 출국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 이날 압수수색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노총 등은 “노동운동에 대한 공안 탄압”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방첩당국에 따르면 민주노총 간부 A씨 등은 2016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까지 해외에서 북한 노동당 직속 대남 간첩공작기구인 문화교류국 공작원 김모씨를 만나 지령을 받은 뒤 민주노총 산하 노조들과 지역 본부에 하부 비밀 조직을 구축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를 받고 있다. 당국은 A씨가 북한 지령에 따라 민주노총 산하 보건의료노조 간부 B씨, 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노조 간부 C씨, 제주 평화쉼터 D씨를 포섭해 지하망을 구축한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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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은 A씨가 2016년 8월 중국 베이징, 2016년 9월 베트남 하노이, 2017년 9월 캄보디아 프놈펜, 2018년 9월 중국 광저우(廣州), 2019년 8월 하노이 등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선했거나 접선을 시도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특히 2017년 9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선 A씨, B씨, C씨가 각각 혼자서 북한 공작원을 만났다고 보고 있다. 당국은 이들이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북한이 국경을 닫은 2020년 이후론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을 접선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당국은 A씨가 북한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거나 불상의 내용물을 거래했을 가능성을 조사 중이다. 당국에 따르면 A씨는 2016년 8월 베이징에서 방첩기관의 추적을 따돌리고 모처로 이동했는데, 이후 북한 공작원이 A씨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보스턴백을 들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9월 베트남에서는 A씨가 북한 공작원 아들의 오토바이에서 검은색 물건을 받아들고 귀국해 국내 환전소에서 1만 달러를 환전했는데, 이 돈이 북한의 공작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당국은 이번 민주노총 사건이 제주를 기반으로 한 비밀 조직 ‘ㅎㄱㅎ’과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총책으로 지목된 A씨 등이 수차례에 걸쳐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 김씨와 접선한 것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북한 공작원 김씨는 ㅎㄱㅎ에도 지령을 내린 인물이라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민노총 핵심간부, 베트남·중국 등서 북 공작원 접선 의혹

국정원 관계자와 경찰이 18일 제주시 봉개동의 평화쉼터에 주차된 차량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압수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정원 관계자와 경찰이 18일 제주시 봉개동의 평화쉼터에 주차된 차량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관련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압수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A씨가 국내에서 북한과 통신을 주고받기 위해 ‘ㅎㄱㅎ’처럼 북한 문화교류국이 개발한 암호프로그램(스테가노그래피) 등으로 통신한 혐의도 받고 있다. 스테가노그래피는 비밀 메시지를 신문 기사나 보고서, 그림, MP3 파일 등에 숨겨 놓은 뒤 별도의 해독 프로그램으로 풀어야 해독할 수 있다.

방첩당국의 한 소식통은 통화에서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여러 개의 하부망을 구축했다는 혐의인 만큼 기존 제주(ㅎㄱㅎ)·창원(자주통일 민중전위·자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며 “수년간 내사를 통해 상당수 혐의를 확인했다. 앞으로 수사 대상이 더 늘어나면서 간첩단의 규모는 훨씬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방첩당국은 지난해 12월 북한 문화교류국과 연계된 제주 지역 지하조직 ‘ㅎㄱㅎ’의 총책인 K씨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서울과 제주는 물론 경남 창원·진주, 전북 전주 등에서도 관련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날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노조 사무실 건물 출입구에 부착된 국정원 관계자의 출입을 막기 위해 휴게실을 폐쇄한다는 안내문. [연합뉴스]

이날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노조 사무실 건물 출입구에 부착된 국정원 관계자의 출입을 막기 위해 휴게실을 폐쇄한다는 안내문. [연합뉴스]

일각에선 지난해 6월 9일  민주노총이 한국노총과 함께 6·15 공동선언 22주년을 기념한 북한 조선직업총동맹(직총)의 연대사를 받은 게 이번 수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시 북한은 2019년 10월 이후 2년8개월 만에 남측 요청에 공식 회신을 보냈다.

이날 압수수색 과정에서 민주노총 측은 “변호사 입회하에 진행하자”며 방첩당국 수사관과 대치했으며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민주노총 본부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 주변에 700여 명의 인력을 배치했다. 소방 당국도 13층에 있는 민주노총 본부 압수수색 과정에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지상에 에어매트를 설치했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러 와서 마치 체포영장 집행하듯 병력이 밀고 들어왔다”며 “과한 대응에는 뭔가 의도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날 성명에서 “(이번 수사는)2023년 오늘 정권이 구시대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다시 불러와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면서 대대적으로 여론몰이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기획된 공안몰이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며 적극적인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반발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참여연대 등 7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정원감시네트워크도 이날 성명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인 사건을 빌미로 민주노총을 상대로 한 보여주기식 압수수색과 언론플레이로 국정원 개혁의 핵심인 대공수사권 이관을 되돌리려는 기획은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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