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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형 격차 … '인종' 이 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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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96년 북한에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랐다. 평남 남포의 선원(船員)구락부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경비를 서는 군인들의 키가 내 어깨밖에 되지 않았다. 중학생(만 16세에 졸업) 정도로 보여 나이를 물었더니 모두 20세 안팎의 젊은이였다."

북한 주민 구호 활동을 벌이는 비정부기구(NGO)의 실무 책임자인 A씨. 그의 키는 1m75㎝. 96년 이후 매년 북한의 학교.유치원.농장 등을 방문해 왔다. 그는 20일 "그동안 북한 각지를 두루 다녔지만 북한의 키 상황은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나보다 키 큰 이들을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금강산에서 4년여간 근무했던 B씨. 그는 "북측 직원 1000여 명이 일하는데 거의 20대 남녀"라며 "여성은 1m55㎝~1m60㎝, 남성은 1m60㎝~1m65㎝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이들은 그나마 인근 마을의 주민이나 군인들보다 큰 편이라고 한다.

남북 분단은 체제뿐만 아니라 가히 '인종'이 달라졌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한민족을 갈라놓고 있다. 영양.의료 상태가 차이 나 체형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통일 이후 키 차이가 사회.경제적으로 상.하위 계층(남북한 주민)을 가르는 '종족 식별 코드'로 굳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했다.

◆ 키 차이 갈수록 벌어진다=2005년 현재 남북 간 키 차이는 20~39세의 경우 남자 6.9㎝, 여자 4.2㎝나 됐다.

남쪽은 상체보다 하체가 긴 8등신 서구형으로 가는 반면 북쪽은 반대로 하체가 더 짧은 몸매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당국자는 "2005년 탈북자들의 신체검사 결과 북한의 보건 위생.영양 상태는 60년대로 후퇴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유니세프.세계식량계획(WFP)도 북한 현지조사 뒤 아동의 극심한 저성장 상태를 보여주는 보고서를 잇따라 발표했다. 유니세프 등은 당시 측정한 평균 신장.체중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발육부진율(연령 대비 신장 미달)이 조사 대상자의 62%(98년), 42%(2002년)에 이르렀다. 연세대 정우진 보건대학원 교수는 탈북자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25년께 남북 간 키 차이는 남자 11㎝ 이상, 여자 6㎝ 이상으로 한층 벌어질 것으로 예측했다. 한양대 정병호(문화인류학) 교수는 "유전적으로 같은 인구 집단이 서로 다른 생존 환경 때문에 신체 조건이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는 결국 통일을 맞이할 남쪽의 세대가 짊어질 사회.경제적 부담"이라고 내다봤다.

◆ 북한은 일제시대 수준에서 제자리걸음=30년대 경성제대 해부학교실이 20세 이상 조선인 남성들을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북부 지방은 1m66㎝로 남부 지방(1m62.5㎝)보다 3.5㎝나 더 컸다. 하지만 2005년에 와선 남쪽보다 더 작아진 것은 물론 일제시대보다 미미하게(0.4cm) 작아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평북 출신인 강영훈(84.1m70㎝) 전 총리는 "해방 전에 이북 사람이 이남 사람보다 작지 않았다"며 "학생 시절을 돌이켜보면 북쪽이 조금 더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북 출신의 정원식(78).노신영(76) 전 총리는 각각 1m78㎝의 장신이다. 원복규(76.1m73㎝) 평북도민회 사무국장은 "48년 서울에 오니 여관 방이 좁아 대각선으로 누워 자야 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북고남저(北高南低) 현상은 당시 중국 대륙에서도 입증됐었다. 일본 학자 오바마 모토지(小濱基次)는 38년 논문을 통해 "북쪽에 있는 산둥(山東)성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7.19㎝로 가장 크고 장쑤(江蘇.중부)성 166.1㎝, 광둥(廣東.남부)성 161.7㎝"라고 발표했었다.

특별취재팀=이양수 팀장, 채병건.정강현 기자

◆ 키와 인종=인류학자들은 영양.보건 환경 때문에 키.몸무게가 크게 차이 나도 동일 유전인자를 갖는 인종의 속성은 바뀌는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신체 외양의 차이가 굳어지고 통일 이후 남북 주민 간 사회.경제적 격차와 겹치면 키가 '차별코드'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종이 달라진다'는 말은 이런 위험성을 경고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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