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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재의 ESG 인사이트] 교체할 결심, 누가 하나

중앙일보

입력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2014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워렌 베니스(Warren Bennis)는 리더십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위대한 사상가였다. 수많은 최고경영자(CEO)들은 그의 리더십 관련 저서와 조언에 의지했다고 술회했다.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저서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담긴 성공신화』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의 순간마다, 혹은 위기의 때마다 워렌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를 풀었다”라고 적었다. 워렌은 리더십 연구를 기업 경영의 지류에서 본류로 인도한 인물로 널리 평가받는다.

오늘날 대다수 민간기업이나 정부 조직들도 리더십을 키우는 데 노력과 자원을 아끼지 않는다. 수많은 리더십 전문가나 컨설턴트들이 존재하는 이유다. 투자자들도 의사결정 시 나름의 잣대에 따라 해당 기업의 CEO 역량을 반드시 평가한다. 해외에서는 포브스나 포춘, CEO투데이, CEO 월드매거진, 캠패러블리(Comparably) 등 여러 기관들에서 매년 CEO 랭킹을 매겨 발표한다. 필자의 오랜 투자 경험에 비춰볼 때 기업가치의 절반 이상은 CEO가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서양은 한번 능력이 검증된 리더에게는 비교적 장기간 일을 맡긴다. 잘하면 굳이 교체할 이유가 없으니 사실상 정해진 임기도 따로 없다. 임무를 수행하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계속 믿고 맡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르다. 우선 공공부문을 비교해 보자. 한성 판윤은 서울시장의 옛 직함이다. 1395년부터 1905년까지 510년 동안 모두 837명의 한성 판윤이 배출됐는데, 이들의 평균 재직 기간은 7.3개월에 불과했다.

반면 뉴욕시장은 어떨까. 1665년부터 1902년까지 237년 동안 총 91명이 있었고, 이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서울시장의 4배가 넘는 31개월이었다. 민간기업도 공공부문과 유사하다. 콘퍼런스 보드(The conference board, 2021)에 따르면 미국 S&P 500 기업들의 CEO 평균 재직 기간은 9.3년이다. 하지만 CEO 스코어(2020년)에 따르면 국내 CEO들의 평균 재직기간은 3.6년으로 미국 기업의 3분의 1 수준에 머문다.

이렇듯 국내처럼 CEO나 수장이 자주 바뀌면 긴 안목의 경영을 할 수 없다. 과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반도체 투자도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장기적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현대그룹의 자동차‧조선업 성공의 이면에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라는 리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국내처럼 3년 전후로 CEO가 교체되면 해당 CEO들은 임기 내에 성과급 최대화, 스톡옵션이 있을 경우 그 차익 극대화를 위해 단기성과 위주의 경영에 매달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사업 모델이나 제품  및 서비스 혁신 등에 있어서 현상 유지나 관행적 경영에 머물기 쉽다. 신수종 사업 발굴을 위해 회임기간이 긴 영역에 과감하게 자원을 배분하고, 연구개발(R&D) 파이프라인을 확장해 혁신적으로 판을 바꾸려는 모험적 시도는 엄두도 못 낸다. 설령 시도했다 하더라도 미완성으로 임기를 마칠 가능성이 높고, 후임자가 이를 계승하지 않으면 기왕에 투자된 자금과 노력은 매몰비용이 된다. 이처럼 혁신과 전환이 생략된 단기적 관행 경영은 외적으로 순항하는 듯하나, 장기적으로 퇴행하기 쉽다.

국내 공공기관이나 공기업 CEO의 경우에도 통상 임기는 3년이다. 게다가 기관장 선임 시에도 해당 분야 전문성과 경험, 그리고 조직 관리 역량이 부족한 리더들이 정치적 배경 아래에서 선임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럴 경우 취임 초기 6개월에서 1년 동안은 업무 및 조직 파악에 급급하고 나머지 2년 남짓 일을 좀 하다, 임기 만료 전 수개월 동안은 사실상의 레임덕을 거친 후 임기를 마친다. 조직 발전을 위해 CEO가 있는 것이 아니라, CEO 자리를 위해 조직이 존재하는 주객전도, 그리고 위인설관(爲人設官)의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탁월한 리더십으로 조직의 변화와 성과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최근 주총 시즌을 앞두고 오너 없는 민영화한 공기업의 CEO 연임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다. 특히 KT의 CEO 연임 건이 세간의 화제다. 지난해 KT의 최대주주인(10.74% 지분 보유) 국민연금 이사장과 기금운용본부장이 KT의 CEO 선임에 대해 문제 제기했다. CEO 후보 선임의 절차와 과정상 투명성을 결여했기에 셀프 연임 개연성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즉 독립성 없는 사외이사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추천한 CEO 후보는 결국 CEO 자신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우려다. 단일 최대주주이자 2000만 연금 가입자들의 노후자금 운용을 책임진 수탁자로서 의당 제기할 만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형식적 정당성이 그 내용의 정당성까지 담보하지는 않는다. 민영화 이후 KT는 정권 교체기마다 CEO 잔혹사를 겪었다. 2008년 남중수 사장은 배임 재 혐의로 구속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취임한 이석채 회장도 비자금 조성 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2013년 물러났다. 황창규 회장도 국정 농단에 연루돼 검찰 수사를 받았고, 현재의 구현모 사장도 현재 재판 중이다.

이 모든 잔혹사 배경에 시장의 문법이 아닌 정치 문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주장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다. 5년 주기의 정권 교체기마다 오너 없는 대기업들이나 금융지주사들이 집권세력의 논공행상 자리로 활용된다는 의심도 가능하다. 정권 교체 주기와 해당 기업들 CEO 임기가 엇박자일 때 의구심은 증폭된다. 중도 하차를 위한 먼지털기식 검찰 수사가 동원됐다는 지적과 함께. 하지만 ‘누가 CEO인가’는 리더십, 기업 지배구조 그리고 지속가능한 발전의 측면에서 중차대한 이슈다. 따라서 CEO 선임 및 연임 결정은 투명한 절차와 과정을 거치고 해당 후보들의 경영 전문성과 객관적 성과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민영화한 공기업’이란 말은 ‘결혼한 처녀’라는 말과 같다. ‘결혼했으면 유부녀이듯 민영화했으면 민간기업’일 뿐이다. 따라서 기업가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CEO 선임은 철저히 주주들과 임직원들을 비롯한 이해관계자들의 장기적 번영과 이익의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제 더는 셀프 연임도, 낙하산 선임의 기제도 끊어야 한다. 워렌 베니스의 말처럼 “비전을 현실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자의 소유자인지”, “단기적 관점이 아닌 장기적 관점의 보유자인지”등이 최우선 판단 기준이 돼야 할 것이다. 주주와 이해관계자가 그 모든 결심의 주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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