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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공화국의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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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친구에게서 고급스러운 가운을 선물받고 ‘나의 오래된 가운을 버림으로 인한 후회’라는 에세이를 썼다. 새 가운을 서재에 걸어두었다가 어울리지 않는 낡은 가구들을 하나둘, 나중에는 싹 다 바꾸며 낭비했다는 얘기다. 이런 연쇄 소비를 ‘디드로 효과’라고 한다. 새집에 이사하면 어울리는 새 가구를 들이듯 명품백을 들면 명품시계를 차고 싶어지고, 명품 옷을 입고 싶어지는 식이다.

명품백을 구입하기 위해 백화점 앞에서 대기하는 오픈런. 우리 사회 명품 열기를 잘 보여준다. [사진 뉴시스]

명품백을 구입하기 위해 백화점 앞에서 대기하는 오픈런. 우리 사회 명품 열기를 잘 보여준다. [사진 뉴시스]

 다른 사람이 쉽게 살 수 없는 예술품이나 한정품, 명품 등 차별적 재화를 과시하듯 소비하는 ‘스노브 효과’도 있다. ‘베블런 효과’는 물건 가격이 오르는데도 특정 계층의 허영심이나 과시욕으로 수요가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뜻한다. 셋 모두 가격이 치솟아도 끊이지 않는 ‘명품 사랑’을 잘 설명해 준다.
 지난해 우리나라가 1인당 명품 소비를 가장 많이 한 나라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최근 투자은행 모건스탠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명품 소비는 2021년보다 24% 증가해 168억 달러(약 20조9000억원)로 추산됐다. 1인당 명품 소비액은 325달러(약 40만원)로 미국 280달러, 중국 50달러를 앞섰다. 보고서는 한국의 소비는 “다른 나라보다 외모와 경제적 성공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명품 열풍의 주 요인으로 ‘사회적 지위 과시’ 욕구를 꼽았다. 부를 드러내는 것에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도 있다. 앞서 글로벌 컨설팅업체 매켄지 설문조사에서 명품 과시를 부정적으로 본 응답은 일본 45%, 중국 38%, 한국 22%였다.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지인은 “한국 지하철에 명품 가방을 든, 그것도 젊은 여성이 너무 많아서 놀랐다”고 말했다. 최근 몇 년간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명품 열기는 불확실한 미래, 내일을 대비하기보다 현재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소확행(작은 사치로 인한 행복)’ ‘플렉스(돈 지르기)’ 문화 등과 관련이 깊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어차피 집을 장만하는 것은 글렀으니 ‘집 대신 명품 가방, 수퍼 카’라는 식이다. ‘지금, 나’에 집중하는 소비와 라이프스타일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미래를 감수해야 하는 전 세계 MZ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 ‘코로나 보복소비’와 SNS도 있다. 자신의 매력 자본을 시각적으로 인증해야 하는 SNS 세계에서 명품 소비만큼 ‘내가 잘나간다’는 증거는 없다. 최근에는 SNS 인증샷을 위해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까지 중고 거래된다는 보도도 있다.
 ‘영 앤 리치’에 대한 선망 속에 명품백을 사기 위해 알바를 하거나 ‘가방계’를 들고, 새벽부터 명품 매장 앞에 대기하는 ‘오픈런’, 명품은 오늘이 제일 싸니 명품을 통한 재테크(일명 ‘샤테크’) 등도 새로운 일이 아니다. 젊은층을 비롯해 명품 소비자층이 넓어지다 보니 명품 브랜드들은 ‘물 관리’에 한창이다. 1년에 몇 번씩 가격을 인상하거나 아예 기존 구매 내역이 있어야만 구매 자격을 주는 등 장벽을 친다. 그러나 명품이 비싸질수록, 돈이 있다고 아무나 못 사는 존재가 돼갈수록 명품에 대한 갈망은 더 커질 뿐이다.
 지난해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17개국 성인 1만9000명을 대상으로 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가치’ 설문조사에서 한국은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1위로 꼽은 나라였다. 17개국 중 14개국이 ‘가족’을 1위로 꼽았다. 전체 응답자들의 응답 순위는 가족 38%, 직업 25%, 물질적 풍요 19%였다.
 이처럼 유난한 물질주의와 과시적 명품 소비에는 단순히 부를 숭상하는 것을 넘어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로 상대를 평가하고 보여지는 것이 없으면 쉽게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평범한 2030까지 명품 열풍에 뛰어든 이면에는 동조성 강한 사회에서 ‘명품백 하나 정도는 있어 줘야 꿀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기보호 기제가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명품에 빠지는 것은 취약한 자존감의 결과라며 ‘명품 구매보다 자신이 먼저 명품이 돼라’는 ‘조언’이 무력해지는 이유다.

지난해 1인당 명품 소비 세계 1위 #삶의 가치 1위 응답도 ‘물질적 풍요’ #우리 안의 물질주의 되돌아 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