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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찬호 논설위원이 간다

만 나이 의무화…여야가 모처럼 합의한 ‘여의도의 기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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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60년 버틴 ‘세는 나이’ 사라질까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나는 분명히 60세요! 내 원서 안 받아주면 소송 걸겠소!” 2019년 벽두 평택시 송탄출장소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A씨는 곤혹에 빠졌다. 그의 회고다. “당시 평택시는 노면 청소용 살수 차량 운행을 돕는 기간제 근로자 채용 공고를 냈다. ‘공고일 기준 60세 이상’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응모자 한 분이 1959년 8월생이었다. 공고일이 2019년 2월 14일이라 59세에 해당해 ‘자격 미달’이라 통보하니 그는 ‘다들 날 60세라고 한다. 직장도 정년(60세) 퇴직했다’며 열 번 넘게 항의 전화를 걸어왔다. 그때마다 시청 소속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한 시간 넘게 통화하며 설득했지만 마이동풍이더라. 이를 보고받은 정장선 시장이 대책을 지시해 행정안전부에 만 나이 사용을 공식 건의했다. 경로당 등 현장에 가면 실감하는데, 시민들이 만 나이 계산을 어려워하신다.”

기초연금 지급 기준 시비 많아

정장선 평택시장의 말이다. “기초연금 지급 기준이 65세인데 63~64세인 분들이 신청하러 왔다 허탕 치고, 12월 출산이 기피되는 등 나이 혼용으로 인한 부작용을 많이 목격했다. 또 평택의 미군 기지 관계자들을 만나면 ‘한국 나이로 몇 살’이라고 하더라. 나이에 이런 사족을 붙여야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해 2월 23일 중앙정부에 ‘만 나이 일원화’를 공식 건의하고 보도자료도 냈다.”

북한도 안 쓰는 ‘세는 나이’ 혼용
버스비·감기약 용량 등 곳곳 혼란
재한 외국인 “나이? 00년생이 답”
민주 이장섭·정장선 ‘만 나이’앞장

지난해 1월 윤석열 대선 후보가 유튜브에 공개한 만 나이 통일 공약 홍보 쇼츠. [유튜브 캡처]

지난해 1월 윤석열 대선 후보가 유튜브에 공개한 만 나이 통일 공약 홍보 쇼츠. [유튜브 캡처]

대한민국에서 법령상 나이는 민법에 따라 만 나이 계산이 원칙이다. 하지만 일상에선 출생일부터 한 살로 치고, 해마다 한 살씩 더 하는 ‘세는 나이’를 써 혼선이 끊이지 않았다. 또 북한조차 만 나이를 쓰는 마당에 한국만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는 나이를 쓰니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에 공감한 윤석열 대통령은 만 나이 사용을 대선 공약으로 내놨고, 그가 집권함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12월 27일 민법과 행정 기본법을 개정해 “나이는 만 나이로 계산하고 연수로 표시한다”고 명시, 오는 6월 28일 시행에 들어간다.

만 나이 의무화는 야당이 더 적극적인 점도 눈에 띈다.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 만 나이 일원화를 정부에 건의한 평택시 정장선 시장은 더불어민주당 3선 의원 출신이다. 또 이장섭 의원(초선·청주 서원) 등 민주당 의원 13명은 2021년 6월 ▶연령의 ‘만 나이’ 일원화 ▶정부와 지자체의 공문서 만 나이 표기 의무화와 대국민 홍보 실시 등을 규정한 ‘연령 계산 및 표시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이장섭 의원은 “병역만 해도 만 나이, 연 나이, 세는 나이 등 기준이 3가지나 있더라. 이런 중구난방식 나이 혼용에 따른 행정 혼란을 없애고, 코로나로 고통받은 국민의 나이를 줄여주는 효과로 정서적 위로를 주는 법안을 구상했다”며 “지역구 유권자들도 ‘좋다’는 반응이 대세여서 법안을 대표 발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 법안이 채택된 것은 아니지만, 현 정부가 민법 등의 개정을 통해 만 나이 사용을 의무화했으니 잘 됐다”고 평가했다.

일상 여기저기에서 ‘나이 전쟁’

법제처가 공개한 만 나이 의무화 홍보 포스터.

법제처가 공개한 만 나이 의무화 홍보 포스터.

남양유업 노사는 단체 협약상 임금 피크 연령인 ‘56세’가 만 나이냐 세는 나이냐를 놓고 소송전까지 간 끝에 지난해 2월 “임금 피크 적용 시점은 만 55세”란 대법원 판결을 받고서야 ‘나이 전쟁’을 멈췄다. 법제처 관계자는 “나이로 인한 혼선은 그 외에도 많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12세 미만은 20㎖로 섭취를 제한한 어린이 감기약의 경우 만 11세 아이를 12세로 여겨 용량을 초과해 먹이는 경우가 있다. 25세 이상 가족에게 혜택을 주는 자동차 보험도 마찬가지다. 세는 나이로 25세인 24세가 사고를 냈는데 보험사는 적용을 거부해 다툼이 발생했다. 또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상 6세 미만 동반 아동은 무료인 버스나 선박의 경우 만 5세인 자녀를 6세로 여기고 요금을 냈다가 뒤늦게 환불을 요구하는 부모들이 꽤 있다. 이 때문에 경기도 버스 조합 홈페이지엔 ‘6세 미만은 만 6세 미만을 말합니다. (연령 관련해) 기사님들과 실랑이하지 마시고 요금 낸 뒤 버스 회사에 환불을 요청하세요’란 안내문이 올라 있을 정도다.”

재한 외국인들도 불편이 상당했다. JTBC ‘비정상회담’ 출신 방송인 다니엘 린더만(독일인)은 “나이 얘기할 때마다 독일식 나이에 한살 더해야 해 헷갈렸다”며 “이젠 만 나이로 통일된다니 나 같은 외국인에겐 편해지겠다”고 했다. 한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도 “한국 언론을 인용해 기사 쓸 때 나이가 나오면 만 나이인지 세는 나이인지 알 수 없어 아예 나이를 빼버린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칠순 고령이라 사면 됐다’처럼 나이를 꼭 넣어야 하는 기사를 인용할 땐 인터넷 인물 정보에 들어가 생년월일을 보고 만 나이를 직접 계산해 쓴다. 그 뒤 한국 언론에 나온 박 전 대통령 나이를 보면 한 살 더 많이 표기돼있더라.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나이 물을 땐 ‘몇 살’ 대신 ‘몇 년생’ 인지 묻고, 한국인이 내게 나이를 물어도 ‘몇 년생’이라 답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게 편하다. 올해부터는 만 나이로 통일된다지만 난 한국인을 인터뷰할 때 계속 몇 년생이냐고 물을 것이다. 몇살이냐 물으면 고령자들은 세는 나이로 답할 것으로 보여서다.”

“젊어진다” 여성·청년, 만 나이 환영

법제처가 지난해 9월 국민 63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81.6%(5216명)가 만 나이 사용에 찬성했다. 특히 20대(67.8%)와 30대(65.7%)의 찬성률이 51.7%~55.9%에 그친 40~60대를 크게 앞섰다. 또 여성(67.4%)의 찬성률이 남성(53.9%)보다 높았다. 법제처 관계자는 “나이에 민감한 여성과 청년이 만 나이가 주는 체감 나이 하향과 서열 문화 타파 효과를 긍정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대한민국이 젊어집니다’란 구호로 만 나이 사용 홍보에 들어갔는데 맘카페 등의 댓글 반응이 폭발적”이라 했다.

포털 네이버도 20대에게 따로 뉴스를 제공하는 ‘마이 뉴스’ 서비스의 나이 기준(30세 미만)을 지난해 12월 29일부터 세는 나이에서 만 나이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29세임에도 세는 나이로 30세여서 뉴스가 제공되지 않았던 이들이 ‘마이 뉴스’를 볼 수 있게 됐다. 세는 나이와 만 나이를 섞어 써온 언론 사이트의 인물정보도 만 나이로 통일되고 있다.

1962년 도입 만 나이, 이젠 정착할까

일본도 원래는 세는 나이를 썼다. 그러나 1945년 2차 대전 패전 직후 식량난에 시달리면서 배급제가 실시되자 문제가 생겼다. 똑같은 ‘1살’이라도 1개월령 아기와 11개월령 아기에 같은 양의 식량을 주는 건 안 된다는 논란이 불붙은 것이다. 노인 식량 배급도 연말생이 연초생보다 1년 가까이 우선권을 갖게 되며 시비가 불거졌다. 결국 “만 나이만이 답”이란 인식 아래 ‘나이 세는 방법에 관한 특별법’이 1949년 공포돼 1950년 시행됐다.

한국도 1961년 만 나이의 공식사용을 선언했었다. 그해 12월 송요찬 내각 수반은 “세는 나이는 12월 31일생이 태어난 지 하루 만에 2살이 되어 버리는 모순이 존재한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후 1962년 정부는 만 나이를  민법상 공식 적용하고 사용해왔지만, 그 뒤로도 60년간 세는 나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을까.

이완규 법제처장은 “이제는 만 나이가 정착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박정희 정부 때 이중과세를 추방한다며 구정 대신 신정만 지내게 했지만 실패했다. 국민이 차례를 음력으로 지내는 관행 때문에 그런 거다. 그러나 만 나이는 국민에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게 아닌 데다, 민주당도 초당적으로 합의하는 사안이니 정착될 것으로 확신한다. 다만 민주당이 내놓은 특별법 대신 민법과 행정기본법 개정을 택한 건 국민이 자주 접하는 기본법에 만 나이 의무화를 못 박는 게 효과가 더 클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