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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브람스와 바그너, 같지만 다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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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새해를 맞아 서울시향이 지휘자 얍 판 츠베덴(Jaap van Zweden)과 함께 청중을 만났다. 지난 12~13일에 열린 이번 음악회는 원래 계획한 프로그램과 연주자가 다 바뀌는 상황이었지만, 새로 부임하게 된 세계적인 지휘자와 서울시향의 첫 무대에 기대감에 롯데콘서트홀이 가득 찼다.

프로그램은 독특했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 바그너의 음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와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이었다. 브람스와 바그너의 작품은 보통 한 무대에서 들을 수 없는 음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브람스는 교향곡·실내악 등 기악음악 위주로 작곡했고, 바그너는 오페라 중심으로 작곡했기에, 이 두 작곡가의 작품은 콘서트홀과 오페라 하우스에서 분리되어 공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브람스와 바그너는 모두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이지만, 음악적 양식과 미학적 성향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이러한 색다른 프로그램은 새 지휘자의 의도를 반영한 듯하다. “바그너야말로 내가 어떤 사운드의 세계에서 비롯됐는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작곡가”라는 지휘자 츠베덴의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공연에서 지휘자는 자신의 음악적 색채를 명확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상반되는 미적 지향점을 감각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얍 판 츠베덴의 서울시향 연주회
브람스의 절대음악적 아름다움
바그너의 ‘음악으로 철학하기’

올 신년음악회와 함께 서울시향을 새로 지휘하는 얍 판 츠베덴. [사진 서울시향]

올 신년음악회와 함께 서울시향을 새로 지휘하는 얍 판 츠베덴. [사진 서울시향]

브람스는 형식적 균형과 절제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곡가이다. 이번에 연주된 ‘교향곡 1번’은 고전적 전통을 토대로 한 낭만주의 교향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베토벤의 10번’ 교향곡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베토벤 영향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음악미학자 한슬릭이 “교향곡 역사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극찬한 것처럼, 브람스의 개성과 논리적 전략이 집중적으로 반영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교향곡의 주요 주제는 귀에 쏙쏙 들리는 선율과는 거리가 멀고, 대위적 짜임새가 현학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오로지 음들과 음들의 결합을 통해서 펼쳐지는 치밀한 기법이 만들어 내는 사운드는 가히 예술 음악의 백미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서울시향은 이 교향곡의 절대음악적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다소 빠른 템포로 시작한 제1악장은 형식감을 뚜렷하게 드러냈고, 오보에와 클라리넷 선율은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코다의 완벽한 마무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감정적 표현이 구현된 2악장도 대단했다. 다만 말미에 관파트의 음정이 불안하게 연주되어 아쉬웠다. 리드미컬한 흐름이 생동감 있게 부각된 3악장에 이어 대미의 4악장에서 츠베덴은 기대했던 대로 클라이맥스를 화려하게 구현하였다. 금관과 목관의 사운드는 명징했고, 특히 청청한 트롬본 선율이 뇌리에 꽂혔다.

음악회의 후반부에는 바그너의 화려운 사운드가 유려하게 펼쳐졌다. 바그너는 오페라 작곡가이다. 교향곡의 역사는 베토벤에서 끝났다고 생각하며, 음악의 미래는 오페라에 달려있다고 보았던 그는 ‘음악극’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시도하며, 철학과 역사, 사회와 문화를 자신의 음악에 겹겹이 채워 넣고자 하였다. 그래서 바그너는 오페라의 극본까지 직접 썼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음악극에서 기악 파트는 무한선율을 이루며 극을 이끄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전주곡’은 독립된 기악곡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바그너에게 성악뿐 아니라 관현악 사운드도 동등하게 중요했다.

이날 연주된 ‘뉘른베르크 명가수’의 전주곡은 금관악기의 매력이 풍성하게 드러나는 바그너식 혼합음향이 드러나는 곡으로, 지휘자 츠베덴은 첩첩이 결합하는 풍성한 사운드를 통해 가히 ‘음향의 바다’를 느끼게 하며 능숙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반면 섬세하게 전개되는 음향과 조성의 붕괴를 암시하는 화성의 변화가 특징적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은 다소 아쉬웠다. 시작 부분에서 연주의 템포는 너무 빨랐고, 음악적 텍스처는 가볍게 처리하는 듯했다.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적인 사랑의 전개를 암시하는 긴장감 있는 분위기를 전반부에는 느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음악이 흐르면서 점점 몰입감을 상승시켰고, 결국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의 말미에는 츠베덴의 음악에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음악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브람스와 ‘음악으로 철학하기’를 시도했던 바그너! 전통적 보수와 미래적 진보를 대변했던 두 작곡가의 음악을 개성적인 사운드로 선보인 츠베덴과 서울시향의 멋진 행보를 기대해본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