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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에 보는 조카 얼마 주지?" 축의금 이어 세뱃돈 5만원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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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일 부산진구청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이 세배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12일 부산진구청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이 세배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직장인 지상원(42)씨는 올해 설 세뱃돈으로 30만원을 준비했다. 초등학생 조카 2명에게 각각 10만원씩 줄 생각이다. 지난해 설까지만 해도 5만원씩 줬는데, 올해부터 10만원으로 올렸다. 정작 본인의 초등학생 자녀 2명에겐 5만원씩만 줄 생각이다. 지씨는 “다른 건 줄여도, 아이들에게 주는 세뱃돈까지 줄이진 못하겠더라”라며 “자주 보지 못하는 데다, 장난감 하나 사려고 해도 5만원이라 세뱃돈으로 10만원은 쥐여줘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고(高)물가 시대 빠듯한 주머니 사정이 세뱃돈 지출마저 부담스럽게 하고 있다. 세뱃돈을 누구에게, 얼마나 줘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늘었다. 지난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제한 뒤 3년 만에 맞는 대면(對面) 설 연휴를 앞두고서다.

세뱃돈 부담은 최근 불거진 ‘축의금 5만원’ 논란의 연장선이다. 세뱃돈은 축의금과 마찬가지로 생략하거나, 줄이기 쉽지 않다. 지난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외환위기 이후 24년 만에 가장 높은 5.1%를 기록했다. 전기료, 대중교통비 등 공공요금도 줄줄이 오를 예정이다. 물가 상승세가 가파른 데 왜 축의금은 5만원 그대로냐는 질문이 설을 앞두고 세뱃돈으로 이어졌다.

 16일 전북 전주시 양우신협 직원들이 신권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16일 전북 전주시 양우신협 직원들이 신권을 정리하고 있다. 뉴스1

17일 SK커뮤니케이션즈가 지난달 28일부터 이달 4일까지 성인남녀 6044명을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43%가 세뱃돈 적정선으로 “5만원”을 꼽았다. 이어 29%가 “안 주고, 안 받겠다”고 답해 세뱃돈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그 뒤로 “1만원”을 꼽은 응답자가 15%, “10만원”을 꼽은 사람이 10%였다. 안지선 SK컴즈 미디어서비스 팀장은 “경기침체 여파와 팍팍해진 가계살림에도 불구하고 올 설 명절 역시 ‘신사임당(5만원권)’이 대세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분석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5만원권이 세뱃돈 대세로 자리 잡은 건 ‘물가 상승=화폐가치 하락’과 관련 있다. 과거대로 준다고 해도 물가를 반영한 화폐가치는 많이 떨어졌다. 통계청 화폐가치 계산기로 분석한 결과 지난해 기준 5만원은 10년 전엔 4만2600원, 20년 전에는 3만1350원으로 나타났다. 세뱃돈을 10년 전보다는 17.4%, 20년 전보다는 59.5%는 올려야 과거만큼 ‘돈값’을 한다는 얘기다.

인크루트가 최근 8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12.8%는 명절 비용 지출이 “매우 부담된다”, 34.2%는 “약간 부담된다”고 응답했다. 또 물가 수준을 고려한 올 명절 예상 지출 가운데 ‘가족 용돈’에는 평균 38만원, 설 선물 비용에 평균 40만원이 들어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정연우 인크루트 브랜드커뮤니케이션 팀장은 “약 절반가량의 응답자가 명절 비용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사실 세뱃돈을 얼마 줄지는 해마다 반복되는 고민이지만, 지난해 물가가 크게 오르다 보니 올해 느끼는 부담감은 더 커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2009년부터 발행된 5만원권이 경조사·세뱃돈의 기본 단위를 올렸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경제학자들의 주장처럼 새로운 고액권이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실제 5만원권이 출시된 뒤 시장조사기관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만원권이 축의금이나 세뱃돈의 단위를 더 커지게 했다’는 데 57.3%의 응답자가 동의했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일본의 1만엔, 미국의 100달러에 대응하는 10만원권의 발행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지만 진척되지 않는 이유다.

고액권에 대한 한국은행의 고민도 깊다. 설·추석 등 명절을 중심으로 5만원권을 비롯해 신권을 선호하는 현상이 유독 심해서다. 한은은 16일부터 각 지역 시중은행에 공급할 설 자금을 방출·운송했는데 일부 지역본부에선 신권 교환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2017~2021년 기준 연평균 1100억원씩 신권을 발행하는 데 쓰였다. 주요 은행 지점에선 신권 교환에 매수 제한을 두고 있다.

한은 "화폐 교환 시 신권 대신 기존 지폐로"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렇게 나간 돈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화폐발행 잔액은 2016년 말 97조3822억원에서 지난해 말 174조8622억원으로 늘었다. 화폐발행 잔액은 한국은행이 발행해 시중에 공급한 화폐 중 환수한 금액을 뺀 잔액이다.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는 현금 규모를 뜻한다. 특히 5만원권이 잘 돌아오지 않는다. 한은에 따르면 2021년 기준 90~100% 환수율을 보이는 1000원·1만원권과 달리, 5만원권은 환수율이 17.4%에 그쳤다. 고액권이 지하경제를 키운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은은 신권 발행을 줄이는 방향으로 대응하고 있다. 지난해 3월부턴 화폐 교환 시 신권이 아니라 ‘사용화폐’로 바꿔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로 했다. 사용화폐란 시중에서 유통되다 한은으로 돌아온 뒤 재발행 가능하다고 판정받은 ‘중고 화폐’다. 한은 발권기획팀 관계자는 “사용화폐를 적극적으로 유통할수록 신권 발행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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