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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전기세’와 헤어질 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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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이럴 거면 한전을 왜 상장시켰나.” “차라리 주식을 거둬들여 국유화하라.”

지난해 말 전기요금 인상 발표 직후 한국전력 소액주주들이 모인 토론방이 들끓었다. 정부가 밝힌 인상 폭은 킬로와트시(㎾h)당 13.1원. 인상률은 9.5%로 1981년 2차 석유파동 이후 최대였다. 하지만 주주들의 기대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는 전기요금이 원가 수준을 회복하려면 ㎾h당 51.6원 올려야 한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시장에선 이번에는 못해도 30원은 올리지 않겠냐는 예상이 흘러나왔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인상 폭에 대해 “상당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하지만 결국은 요청액의 4분의 1만 반영했다. 한전으로선 올해도 팔수록 밑지는 장사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새해 증시가 열리자마자 한전의 주가는 11% 넘게 폭락했다.

빚덩이 한전, 채권 이어 증시 압박
또다른 ‘코리아 디스카운트’ 우려
‘단계 인상’ 말보다 제도 보완부터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업무 보고를 받기 전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업무 보고를 받기 전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소액주주의 분노에 “누가 그런 주식 들고 있으라 했나”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한전의 천문학적 빚덩이가 일으킨 흙탕물이 한전 소액주주들에게만 튀는 게 아니란 것이다. 증권가에선 벌써 “한전이 국내 증시 반등의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라면 한전은 올해도 10조원 가까운 적자를 낼 전망이다. 올해 코스피 상장기업들의 예상 수익이 통틀어 150조원가량인데, 한전이 10조원을 까먹으면 한국 증시 전체의 주가수익비율(PER)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코스피가 실적에 비해 비싸게 보이도록 만드는 효과를 낸다. 또 하나의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한전의 빚덩이에 짓눌린 건 증시뿐만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채권시장을 휘저어 놓는 바람에 기업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적자에 빠진 한전은 지난해 이후 대규모 채권을 발행하며 ‘블랙홀’처럼 돈을 빨아들이고 있다. 부채비율도 지난해 425%까지 올라간 것으로 추산된다. 민간기업이라면 부채비율이 200%만 넘어가도 돈 빌려달라고 손 내밀기가 힘들다. 그런 한전이 국가가 보증하는 공기업이란 이름으로 높은 금리까지 내세워 시중 자금을 쓸어갔다. 그러니 대부분의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금리를 더 주고 급한 자금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시중금리 오름세도 가팔라졌다. 대출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자를 더 치러야 했다. ‘싼 전기료’가 미래세대에 부담을 지우는 차원을 넘어 당장 시장을 왜곡하고, 무작위로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요금의 결정권은 정부에 있다. 전기요금이 흔히 ‘전기세(稅)’로 불리는 이유다. 한전이 조정안을 짜 주무부처인 산업부에 올리면 기재부와 협의해 인가할지를 결정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실상은 정부가 인상 여부뿐 아니라 인상 폭도 결정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급과 원가라는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가 작동한다. 기재부는 물가 부담을 이유로, 여당은 정치적 부담을 들어 인상을 꺼린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는 이런 현상이 극심해진다. 2021년부터 전기 원료 가격이 빠르게 오르기 시작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요금 인상을 틀어막았다. 그 결과 2021년 이후 지난해 6월까지 한국의 전기요금 인상은 4.6% 오르는 데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일본은 35.6%, 프랑스는 25.6%, 미국은 21.5%를 각각 인상했다. 가격이 왜곡되니 수요 조절 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요금을 대폭 올린 유럽연합(EU) 24개국에선 지난해 1~10월 전력소비가 10.8% 줄었다. 반면 원가보다 싼 전기요금을 유지한 한국에선 오히려 소비가 4% 늘었다. 그 차액 만큼 고스란히 쌓인 빚이 지난해 30조원을 넘긴 것으로 추산된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쌓인 숙제 하듯 요금인상에 나섰지만 역시 속도는 더디다. 기재부의 입장은 전기요금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경기는 꺼지고, 내년 4월 총선도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간의 경험칙상 ‘단계적 현실화’란 에너지 가격이 안정되길 바라며 시간을 벌려는 궁여지책일 가능성이 크다.

시장도 이를 의심하고 있다. 맥을 못 추는 한전 주가가 그 방증이다. 불신을 넘어서려면 말보단 행동이 필요하다. 유명무실한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부터 제대로 작동하도록 보완하라는 얘기다. 그러자면 전기요금이 아닌 전기세와 헤어질 결심부터 단단히 해야 한다. 정부의 에너지 정책과 관리 능력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