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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원경의 이코노믹스

규제 완화·옥석 감별이 바이오산업 도약 열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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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성장판 닫힌 한국 바이오산업

조원경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 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

조원경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 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우리 국민이 바이오산업에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국산 백신이나 신약을 향한 관심과 기대에 주가는 질주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시장 열기는 냉랭하게 식었다. 코스닥 기술특례 상장제도 평가항목을 26개에서 35개로 늘린 후 바이오 기업의 상장은 어려워졌고, 주가 하락으로 자본시장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예컨대 지난해 기업공개(IPO)에 성공한 바이오·제약·헬스케어 기업 수는 12개로, 2020년(27개)의 절반도 안 된다. 공모금액은 2020년(1조6200억원)의 20%인 3300억원에 그쳤다. 바이오 벤처의 자금줄인 벤처캐피탈(VC)의 바이오 투자도 급감했다. VC의 업종별 신규 투자에서 바이오 비중은 지난해 16.3%로 2020년 27.8%에서 크게 떨어졌다. IPO 봉쇄와 VC 투자 감소 등은 바이오 벤처들의 극심한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인력 감축, 급여 체불, 연구개발(R&D) 축소가 업계에 횡행하면서 바이오산업의 씨앗까지 말라버릴 수 있다고 우려할 정도다.

말로만 그친 바이오산업 육성

되짚어보면 고령화 추세에 맞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이오산업 육성을 캐치프레이즈처럼 내걸었으나 신약 강국을 향한 혁신적인 발걸음은 전혀 내딛지 못하고 있다. 바이오산업을 신성장 동력이자 기간산업으로 키우겠다는 다짐은 공허한 메아리였나. 세계 바이오헬스 시장은 앞으로 지속적인 확대가 예상된다. 이에 따라 향후엔 한국 3대 수출품목인 반도체ㆍ화학제품ㆍ자동차를 합친 시장 규모와 맞먹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그러나 국내 바이오산업은 아직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이 미미해 국가 차원의 전략 정비와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기업공개 줄고 주가·투자도 급락
인력 감축에 개발 위축 사면초가

보스턴엔 기업·대학 1000개 밀집
산·학·연 연결한 벤처생태계 필수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10% 그쳐
국가 차원의 메가펀드 조성해야

우리나라 바이오산업이 융성하지 못하는 이유로 기업가 정신과 대규모 장기적 투자, 바이오 생태계, 정부 전략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이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 모든 게 결국 바이오산업의 ‘신뢰 적자(赤字)’ 문제로 귀결되었다.

우선, 기업가 정신과 대규모 장기 투자를 보자. 연구실에서 개발에 집중한 사람들의 경우 기업가 정신이 부족한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새로운 기술이 비즈니스로 연결되려면 투자 자본을 조달하고, 시장에서 성과가 날 때까지 버티면서 연구개발을 계속하는 투지와 시장을 개척하는 결단력 등을 필요로 한다.

신약개발엔 10년 넘게 수천억 들어

조원경의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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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메우느냐다. 미국을 비롯한 바이오 선진국은 벤처캐피탈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바이오 벤처의 역사를 보자. 제넨텍(Genentech)은 1976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출신의 벤처 캐피털리스트 로버트 스완슨과 UC샌프란시스코의 유전공학자 허버트 보이어교수가 공동 설립한 세계 최초의 바이오테크 회사다. 보이어가 만든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벤처 투자가인 로버트 스완슨이 상업화하기 위해 제넨텍을 설립했다.

제넨텍은 여러 바이오 의약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대학 실험실에만 있던 많은 학자를 비즈니스 세계로 나오도록 유도했다. 제넨텍은 연간 매출액의 20~25%를 바이오신약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신약을 개발하는 데 평균 10년 이상의 기간과 수백에서 수천억 원이 소요된다. 성공확률이 1만분의 1 정도로 낮지만, 연구개발 후 수익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미국 굴지의 제약 회사인 엘리 릴리 앤 컴퍼니(LLY)는 2022년 말 시가총액이 세계 17위의 기업이다. 27위로 하락한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을 능가했다. LLY는 2021년 34위에서 17위로 껑충 뛰었는데 삼성전자는 16위에서 27위로 하락했다. LLY의 주당 가격은 2022년 연초 271달러에서 연말 366달러로 상승했다. 주식시장이 미국 제약·바이오 기업의 가치와 성장 가능성을 인정한 단적인 사례다. LLY에서 주목할 것은 과감한 투자와 인내다. 이 회사의 신약 개발 소요 비용은 평균 26억 달러(약 3조원)이고 연구부터 환자 처방에 이르는 소요 기간은 10년이다.

대기업들도 원천 신약 개발 주저

바이오산업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도 이런 기업 출현이 가능할까. 우리나라 대표 제약·바이오 회사로 인식되는 삼성바이오로직스·셀트리온·SK 바이오사이언스는 위탁 생산이 주된 사업이다. 현재로선 이들 같은 대기업 역시 천문학적인 투자와 오랜 인내가 필요한 원천 신약 개발에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결국 모험정신이 투철한 바이오 벤처 육성이 필연적인 셈인데, 이를 위해선 기업가 정신과 장기 투자의 수혈이 가능해져야 한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둘째, 바이오 생태계 취약 문제다. 미국과 유럽 등 바이오 선진국들은 산-학-연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이 활발하다. 바이오테크 산업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보스턴의 경우 바이오젠·노바티스·모더나 등 1000여개 이상 기업과 연구소·병원·대학교가 모여 있다. 바이오 업계의 신기술 동향이 실시간으로 공유돼 혁신의 토양을 형성한다. 오픈 이노베이션은 바이오테크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았다. 개발 기간과 비용이 획기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글로벌 제약사와 바이오 벤처의 제휴 또는 빅딜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례가 급증했다.

아직 한국의 바이오 생태계는 초기 단계다. 규모는 적고, 규제도 강하다. 글로벌 제약회사들은 아시아의 바이오 허브로 엄청난 시장 규모의 중국과 규제가 없는 싱가포르를 선호한다. 게다가 대학·연구기관·기업의 협력체제, 글로벌 생태계와의 네트워크도 아직 무르익지 않은 상태다. 규모의 한계는 극복해야 할 과제다. 바이오 기업이 국내 내수만으로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화, 국제화가 필수란 의미다.

초기 단계부터 세계시장 노려야

국내 산업 역사를 보면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에 제약산업의 비중이 상당했다. 국내시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기술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지금도 산업과 기초 인프라가 글로벌 표준과는 달리 국내용으로 형성되다 보니 성장의 한계가 뚜렷하다. 호주 멜버른의 경우 임상시험에서 세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인프라 투자를 대규모로 진행하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초기 단계부터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설정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지 않으면 바이오 벤처는 상장 후 투자 차익을 노리는 도구에 그칠지 모른다.

국내 바이오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해외 의존도가 90% 이상에 달한다는 것은 국제화가 되지 못한 국내 바이오의 현주소를 말해 준다. 국산화는 10%도 채 되지 않는다. 대기업이 국내 소부장 기업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다. 대기업이 이들 제품을 사용했다는 이력을 쌓아야 국내 소부장 기업의 세계적인 경쟁력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바이오 생태계가 뻗어 나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정비가 시급하다. 바이오 투자가 극도로 위축된 배경으로 IPO 기회의 문이 좁아져 VC를 비롯한 투자자의 자금 회수 통로가 막힌 요인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바이오 시장에 거품이 끼었던 지난 몇 년간 ‘상장 후 먹튀’에 급급한 일부 바이오 기업들로 인해 일반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봤다.

감독 당국이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 기술특례 상장요건 등을 강화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바이오 벤처들이 자금난에 봉착해 신약후보물질 발굴과 파이프라인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는 지금의 구조로는 바이오산업 경쟁력 향상을 기대하기 힘들다. 바이오 기업의 옥석을 분명히 가려 가능성 있는 기업이라면 시장에 진입해 필요한 사업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 시스템이 지원해주는 것이 오히려 필요하다.

바이오기술 평가 수준 높여야

시장의 바이오기술 평가 수준도 높여야 한다. 투자를 담당하는 벤처캐피털의 전문성이 낮다 보니 기술 경쟁력보다 시장 트렌드와 분위기에 휩쓸려 투자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국가 주도로 전문가 풀을 구성해 전문성을 엄격히 평가하는 방식으로 상장 문호를 정비하고, 이후 투자에 대해서는 시장에 맡기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기술특례상장 기업이 일반 상장사보다 사업 시장성에서 장점을 발휘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기술특례상장을 어렵게 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나아가 정부 차원의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한 메가 펀드 조성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가라앉은 투자 분위기를 바꾸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

시장이 침체한 지금 같은 상황이야말로 규제 완화를 서두를 때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바이오산업 육성을 위해 포지티브(positive) 규제정책을 네거티브(negative)로 대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규제 개혁 없는 바이오산업 발전은 공염불이다.

조원경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