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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예수의 유머 감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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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고진하 목사

고진하 목사

날씨가 폭폭 찌는 어느 여름날, 길가에 죽은 개 한 마리가 널브러져 있었는데, 왕파리떼가 썩은 개의 사체에 왕왕거리며 달라붙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더럽다고 침을 뱉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지나갔다.

그때, 수염이 텁수룩하고 눈에 유난히 광채가 나는 한 사람이 한참 동안 개의 사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더니, 다른 이들과는 달리 씩 웃으며 말했다. “고놈! 이빨 하나는 희구나.” 이렇게 말한 이가 바로 예수였다고 아랍 민담은 전해주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음부터 팡 터뜨리는 것이 정상.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한 나도 그랬으니까. 적어도 이 민담 속에 나오는 예수의 언설에는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이 깃들어 있지 않은가.

아랍 민담에 나타난 예수의 해학
복음서 곳곳에도 낙천적인 모습
율법의 사슬 깨뜨린 사랑의 기쁨

예수를 따른다면서도 매사에 너무 경건하고 심각하고 진지하고 엄숙한 그리스도인은 어쩌면 이런 예수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예수가 껄껄껄 웃었다든지 유머 감각이 풍부했던 분이라고 말하면 신의 아들의 명예를 깎는 일이라 여기는 오래된 고정관념에 붙잡힌 이들이 많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메시아의 위엄을 한몸에 지닌 예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기쁜 일이 있을 때면 마땅히 미소 짓고 웃는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닐는지. (헨리 코미어, 『예수님의 해학』 참조)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가 제자나 민중들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아주 쉽고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고 해학적인 언어로 말씀하시는 것에 놀라곤 한다. 어디에도 수사학을 배웠다는 기록이 없지만, 예수의 수사 능력은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는 이런 예수의 유머와 해학을 복음서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의 언어가 낙천적이고 해학적이지 않았다면 수많은 무리를 곁에 불러 모을 수도, 그들과 하느님 나라를 두고 으밀아밀 깊은 소통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머와 해학의 감각을 지니려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공기처럼 가볍고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의 삶이 탐진치(貪瞋癡)에 찌들어 한없이 무거우면 결코 가볍고 자유로운 유머와 해학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머와 해학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예수의 면모는 그가 마성의 힘인 ‘중력의 영’(니체)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고통받는 인생들을 초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자신이 걸머진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마태 11장 28~30)웠기 때문이었으리.

요즘 들어 복음서를 읽으며 예수의 해학적인 어법에 주목하게 된 것은, 우리가 넘어야 할 파고(波高)가 그 어느 때보다 거칠고 높기 때문이다. 세계 도처에서 전해져오는 기후변화로 인한 전 지구적 재앙과 종말의 기운은 우리 일상 속까지 스멀스멀 파고들어 심리적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이런 불길한 미래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이들도 주변엔 많다.

예수가 살던 시대 역시 식민세력과 지배자들의 수탈이 만연한 때였기에 예수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온몸으로 함께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언어와 시선은 비관적이지 않고 낙관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죽은 해학을 구사하는 이들과는 달리 예수의 해학에는 사랑과 희망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식일 문제로 시비를 거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혁명적 선언을 통해 사람들의 목을 옥죄는 율법의 사슬에서 해방의 기쁨과 희망을 선사했다.

영생을 놓고 나누는 해학의 백미 하나 더. 한 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를 찾아와 영생을 구했으나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고 돌아가자, 예수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울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다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농(弄)을 하신 예수의 눈에 빛나는 해학의 불꽃을 보고 제자들은 모두 깔깔대고 웃었으리라.

모름지기 예수는 삶의 어려운 질문이나 숱한 난경(難境) 앞에서도 뛰어난 해학의 감각을 발휘하는 촌철살인의 지혜를 보여주었다. 오늘 우리 앞에도 삶의 난관이 은산철벽처럼 첩첩하다.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가 예수를 여전히 스승의 한 분으로 여긴다면 해학의 은총과 지혜를 달라고 간구해야 하리.

고진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