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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갱단 피해 ‘아이티 지진’ 구호품 전달한 70대 목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8면

원승재 목사가 지난 8일 아이티에서 지진 난민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다. [사진 원승재 목사]

원승재 목사가 지난 8일 아이티에서 지진 난민에게 구호품을 전달했다. [사진 원승재 목사]

“파더 원(원 목사님). 앞쪽 길이 갱단들에게 장악됐으니 다른 길로 우회하겠습니다.”

지난 3일 카리브해에 위치한 섬나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한국에서 도착한 구호품을 트레일러에 실어 세관을 빠져나오던 원승재(76) 부산소망성결교회 목사가 현지 운전자 외침에 급히 몸을 숙였다.

2021년 8월 규모 7.2 강진으로 인한 피해가 수습되지 못해 연료 부족 등 기근으로 이어지자 아이티에서는 소요 사태가 일었다. 연료 공급망을 틀어쥔 갱단이 무장한 채 거리를 활보했다. 아이티 치안과 행정 기능은 사실상 마비됐다. 붙들리면 구호품과 목숨이 모두 위태로운 상황. “며칠만 더 말미를 주소서.” 트레일러 조수석에서 원 목사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원 목사는 갱단을 피해 푸지에 있는 희망기술학교에 무사히 도달했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이후 원 목사가 현지에 개설한 교육 시설이다. 컨테이너 4개에 담겼던 구호품을 꾸러미 하나당 라면 6개와 신발 6켤레, 옷가지 20벌을 넣어 포장했다. 이 꾸러미는 지난 8~12일 푸지와 포르토프랭스 레카이 등지 난민촌과 고아원, 종교시설 등에 나눠줬다.

이들 물품은 구호품 모집으로 마련됐다. 모집이 시작된 곳은 부산 삼성여고와 삼성중학교다. 기독교 재단인 두 학교는 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도 성품과 응원의 편지를 보냈다. 2021년 8월 규모 7.2 지진 때는 7000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3만여 가구가 집을 잃었다. 학생들은 물론 뜻 있는 사업가, 종교인 등 부산시민이 옷가지 5만 벌과 신발 3만 켤레 등 1TEU(가로·세로 2.4m×높이 8m) 컨테이너 4개 분량 구호품을 모았다.

원 목사는 부산시 허가를 얻어 모집을 주도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여파로 물류비용이 당초 예상한 2000만원에서 1억원까지 뛰었다. 구호품은 10개월간 삼성여고 운동장에 발이 묶였다.

이 소식을 접한 김광수 포스코플로우 사장이 “비용과 배편을 책임져 구호품을 아이티로 보내라”고 지시하며 ‘수송 작전’ 물꼬를 텄다. 구호품은 지난해 8월 10일 삼성여고 운동장을 떠나 한 달여 만인 9월 15일 포르토프랭스항에 도착했다.

원승재 목사는 지난해 10월 7일 아이티에 입국했다. 그런데 포르토프랭스 세관은 관세 명목으로 3만5000달러(4300만원)를 요구했다. 원 목사는 “평소 3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행정 마비 등이 관세 폭등 원인이었던 듯하다”며 “현지 법원 등을 돌며 탄원서를 모아 관세를 2만5000달러(3100만원)까지 낮췄다. 국내 독지가와 현지 교포들이 2000만원 넘는 돈을 모아줘 겨우 물건을 찾았다”고 했다. 이들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무장한 갱단이 거점을 옮겨 다녀 구호품을 나눠주는 과정에도 늘 위험이 도사렸다. 그는 “교포와 선교사 등 현지 사정에 밝은 분들 도움을 받아 다행히 구호품을 무사히 전달했다. 돌이켜보면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그는 오는 19일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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