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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딸에게 권력 과시하는 김정은의 초조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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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형철 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예비역 공군 중장·리셋 코리아 국방분과 위원

김형철 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예비역 공군 중장·리셋 코리아 국방분과 위원

북한은 지난해 40여 회에 걸쳐 65발 이상의 미사일을 쏘아 올리고 무인기를 한국 영공으로 날려 보냈다. 이런 도발을 벌이는 가운데, 지난해 11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딸 김주애를 화성-17형 장거리 미사일 관련 행사에 대동했다. 새해 첫날에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KN-23으로 추정되는 장비를 둘러보는 모습을 공개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이를 “후계 문제와 관련된 정치적 함의가 큰 움직임”이라고 평가하거나, “어버이 수령으로서 권력의 안정과 인민의 심리적 안정감을 높이려는 상징정치”라고 풀이했다.

필자는 이러한 김정은의 행보를 보면서 몇 해 전 넷플릭스에서 봤던 영화 ‘어느 독재자’가 떠올랐다. 독재국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은 어린 손자와 함께 불 켜진 도시의 야경을 구경하면서 전화 한 통으로 도시의 모든 불을 일제히 껐다가 다시 켜는 행위로 자신이 지닌 권력의 힘을 손자에게 보여준다. 손자는 자기도 해보고 싶다고 하면서 전화로 불을 끄라고 명령하자 대통령궁의 불까지 꺼졌고, 다시 켜라는 명령에도 불은 켜지지 않았다. 대신 총성과 폭발음이 울려 퍼진다.

핵이 외부 위협 막을 수 있겠지만
헐벗은 주민 마음은 달래지 못해
독재는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어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독재자는 다음날 가족들을 해외로 망명시키고 후계자인 손자와 남아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으나,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과 도적 때로 변한 군인들로 가득 찬 나라는 혁명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독재자는 간신히 바닷가에 도착하지만 배는 보이지 않고 추격대가 다가오자 하수도관 속에 숨어 있다 체포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반군에 의해 처형당한 예멘의 독재자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과 하수구에 숨어 있다가 시민군에 생포되어 처형당한 리비아의 철권통치자 무아마르 카다피를 연상케 한다.

쿠데타 등으로 권력을 잡은 후 독재정치를 펴다 저항에 부딪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는 그 외에도 상당수 있다. 1965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콩고의 모부투 세세 세코는 32년간 독재와 축재를 일삼다가 97년 반군에게 축출당하여 모로코에서 죽었다. 68년 쿠데타에 참가하여 79년 이라크의 대통령이 된 사담 후세인은 독재권력을 휘두르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침공한 미·영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어 2006년 처형되었다. 7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우간다의 이디 아민은 79년까지 집권하면서 5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을 학살하였다. 그는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탄자니아를 침공하였지만 되려 탄자니아에 패퇴하여 권좌에서 쫓겨난 후 리비아·이라크 등을 떠돌다가 2003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죽었다. 89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선출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서 인종청소를 저질러 2000년 권좌에서 물러난 후 전범재판을 받던 중 2006년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민을 무시하고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는 비록 그가 정통성을 지닌 지도자라 할지라도 국민 신임을 잃게 되고, 결국 권좌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의 적장자로 태어나 황태손에 책봉되었고, 황태자를 거쳐 1896년 황제에 즉위한 정통성을 지닌 군주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무시하면서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피의 일요일’ 사건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결국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고 권좌에서 쫓겨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은 모두 1918년에 혁명군에 의해 사살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예로부터 백성은 물이고 통치자는 배에 비유된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성난 물은 배를 가라앉히기도 한다. 한반도 북쪽에서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이 언제까지나 백두혈통의 독재에 순종할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핵무기로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헐벗고 굶주린 국민의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어린 딸에게 그가 지닌 권력을 과시해야만 하는 김정은의 행동에서 북한 체제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읽을 수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형철 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예비역 공군 중장·리셋 코리아 국방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