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삵에 속절없이 당한 황새...멸종위기종 서식처 '정주영 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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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서산시 천수만에 있는 서산버드랜드 주변 농경지에 날아든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야생생물 I급 황새 무리가 자태를 뽐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합뉴스

충남 서산시 천수만에 있는 서산버드랜드 주변 농경지에 날아든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야생생물 I급 황새 무리가 자태를 뽐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합뉴스

이사 80일 만에 죽음 맞은 ‘천수’ ‘만수’ 

멸종위기종 삵이 또 다른 멸종위기종 황새를 해쳤다.

지난해 12월 20일 충남 천수만 서산버드랜드 인공방사장에 머무르던 황새 한 쌍이 천수만 터줏대감 삵에게 물려 죽은 사건이다. 충남 예산 황새공원에서 지난해 9월 30일 서산버드랜드에 온 황새 ‘천수’와 ‘만수’의 야생 텃새화 도전은 80일 만에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야생이라면 황새가 쉽게 도망갈 수 있었지만, 그물망으로 덮인 계류장 안에 있던 황새는 삵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했다. 버드랜드는 사고 당일 오전 6시쯤 삵 한 마리가 방사장 천장 그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폐쇄회로TV(CCTV)를 통해 확인했다.

버드랜드 관계자는 “방사장 외부를 빙빙 돌던 삵이 천장 그물과 구조물 사이에 머리를 비집고 들어갔다”며 “당시 서산에 눈이 많이 내려서 먹이구하기 활동이 힘들어진 삵이 방사장까지 찾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방사장 천장은 눈이 쌓이면 무너질 우려가 있어서, 축구 골대 그물망과 비슷한 형태의 그물을 썼다고 한다. 그물망 구멍은 삵 머리 하나가 들어갈 만한 정도 크기다.

고양이과 야생동물인 삵 모습. 중앙포트

고양이과 야생동물인 삵 모습. 중앙포트

천장 그물 비집고 들어가 황새 공격 

야생에 방사한 황새가 감전이나 농약을 먹고 사체로 발견된 적은 있지만, 야생 삵에게 당한 건 이례적이다. 버드랜드는 방사장 보수가 끝나면 일단 닭을 넣어 며칠간 지켜보며 방사장 안전상태를 확인할 예정이다.

삵이 엄연한 ‘가해자’지만, 황새를 지키자고 삵을 함부로 포획할 수는 없다. 국립생태원에 따르면 삵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 황새(천연기념물 199호)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으로 분류됐다. 야생생물보호법에 의해 연구목적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잡는 게 금지다. 포획하더라도 폭발물이나 덫, 올무 등 위해를 가하는 도구를 사용할 수 없다. 현행법상 멧돼지나 고라니·청설모 같은 유해 야생동물만 퇴치 사업을 할 수 있다.

삵은 고양이과에 속한 포유류다. 현재 한반도 육상생태계 최상위 포식자다. 1960년대까지 흔히 볼 수 있었으나 60년~70년대 쥐잡기운동 당시 쥐약에 의한 2차 피해로 개체 수가 급격히 줄면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다. 산림지대와 수변공간 등에 서식하며 들쥐나 새를 잡아먹고 산다. 민가에서 기르는 닭이나 오리 등 가축 피해를 종종 일으키기도 한다.

지난해 9월 30일 충남 예산 황새공원에서 서산 버드랜드 인근 방사장에 입식 된 황새(천연기념물 제199호) 천수와 만수 부부. 이 황새 부부는 지난해 12월 방사장에 침입한 삵에게 물려 죽었다. 연합뉴스

지난해 9월 30일 충남 예산 황새공원에서 서산 버드랜드 인근 방사장에 입식 된 황새(천연기념물 제199호) 천수와 만수 부부. 이 황새 부부는 지난해 12월 방사장에 침입한 삵에게 물려 죽었다. 연합뉴스

천수만 농경지 조성에 철새·야생생물 공존 

천수만 삵은 간척지 공사 이후 개체 수가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고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회장 주도로 1982년~1995년까지 천수만 바다를 메우는 공사를 진행해 154㎢ 달하는 간척지를 조성했다. 대형 유조선을 방조제 구간에 가라앉혀 물길을 막는 ‘정주영 공법’이 이때 사용됐다. 이 공법은 당시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와 '타임'에도 소개됐다. 또 영국 템즈강 하류 방조제 공사를 맡았던 세계적인 철 구조물 회사에서는 유조선 공법을 자문하기도 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갯벌은 파괴됐지만, 대규모 농경지와 담수호·습지가 생기면서 철새와 텃새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곡식 낱알을 먹으러 오는 들쥐 개체 수도 늘었다. 서문홍 국립생물자원관 환경연구사는 “천수만엔 삵의 주 먹잇감인 들쥐나 철새·물고기가 풍부하고 웅덩이에서 물도 쉽게 먹을 수 있다”며 “민가가 적은 데다 갈대숲이나 덤불을 은신처로 활용할 수 있어서 삵이 살기엔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고 말했다.

서산버드랜드 한성우 주무관은 “천수만을 한 바퀴 돌다 보면 도심에서 길고양이를 보는 것처럼 삵 3~4마리는 쉽게 볼 수 있다”며 “과거 물막이 공사 이후 사람 출입도 통제되고, 서식 환경이 좋아지면서 삵 개체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 같다” 고 말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서산방조제 건설 현장에서 공사를 지휘하고 있다. 중앙포토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서산방조제 건설 현장에서 공사를 지휘하고 있다. 중앙포토

“삵도 멸종위기종” 방사장에 가시철조망 보완 

버드랜드 측은 문화재청과 협의해 황새 방사장에 가시 철망을 두르기로 했다. 그물과 맞닿은 천장 끝은 처마형으로 만든다. 삵이 방사장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한 이중 조처다. 충북 청주 상당구 문의면에 있는 황새 방사장에도 같은 형태의 철조망을 설치한다. 경남 김해 방사장은 바닥 면에 가시철조망을 설치했지만, 만일에 대비해 한겹 더 철망을 둘렀다.

이시헌 김해시 화포천습지팀장은 “방사장 근처에 있는 화포천 농경지나 야산에 삵이나 들개가 출몰할 우려가 있어서 군사용 철조망을 설치했다”며 “황새가 방사장 안에서 새끼를 낳고 무사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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