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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 프리즘] 정치인 제멋대로 예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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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호 30면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경제학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정부 사업의 예산 조달을 복권을 통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문을 접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엉뚱한 발상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얼마 전 국회에서 2023년 예산안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서 오래전 읽었던 그 논문이 생각났다.

정부 사업에 복권을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도 체육산업진흥을 위해서 스포츠 토토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육산업진흥 예산의 90% 정도가 스포츠 토토 수입으로 충당된다고 하니 복권으로 정부 사업 예산을 충당한다는 것이 분야에 따라서는 가능한 이야기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마을의 도서관을 건립한다거나 새로운 도로를 건설할 때 복권이 사용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즉 복권의 수익금으로 도서관을 건립하니 참여해 달라고 독려하면 주민들은 복권에서 얻는 오락적인 즐거움도 있지만 마을 도서관 건립이라는 취지에 공감해 복권 구입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쉽게 거둔 세금 생색내기에 사용
목적 분명한 복권사업만도 못해

그렇지만 이렇게 복권을 통해서 정부 사업을 하는 것은 불안정한 예산 조달 방법이다. 복권이 충분히 판매되지 못하면 해당 정부 사업을 추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안정성이 바로 복권이 바람직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해당 사업을 추진하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은 주민들이 도서관 건립이나 도로의 건설의 필요성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설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책 자체에 결함이 있거나 시행과정에서 부정이 있다면 주민들이 복권을 사지 않아서 사업이 좌절될 것인데, 이런 과정에서 낭비적인 정부의 사업들이 중단될 수 있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것이다.

물론 복권의 수입만으로 정부의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디에 쓴다는 말 한마디 없이 엄청난 세금을 거두어 가서는 제멋대로 예산에 배정하는 행태를 반복적으로 지켜보노라면 어이가 없다. 국회에서 정치 다툼만 하는 현재의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면 차라리 복권사업을 통한 예산 지출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정치인과 공무원이 세금을 내는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는 노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복권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기부금과 같은 좋은 제도가 있다. 지금 한국의 기부금에 대한 세금 공제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아무 노력이나 설명도 없이 전혀 힘들이지 않고 거둔 세금으로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자기 마음대로 예산을 집행하기보다는 모든 정부 사업의 일정 비율을 기부금으로 조달해야 한다고 원칙을 정하면 기부금을 모집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서라도 낭비적인 예산 집행이 줄어들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알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미래의 경제 성장은 둔화할 것이 자명하고 정부의 재정 적자는 늘어났으면 늘어났지 줄어들 가능성이 매우 작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재정 적자의 한 요인은 쉽게 거둔 세금으로 자기를 생색내는 곳에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정치인과 공무원들의 마음가짐에 있다고 본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는 국민을 대신해 정책을 결정하는 대의 정치가 필요했지만 현재는 손바닥 안에 스마트폰만 있으면 전 국민이 동시에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복권이든 기부금이든 아니면 다른 방법이든 국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돼 낭비적인 지출이 사라진 정부 예산의 집행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

※중앙SUNDAY 기고를 환영합니다. joongangsunday@joongang.co.kr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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