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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 낡아 툭하면 지연 운행·파업, 영국 ‘철도의 나라’ 맞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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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호 22면

짐 불리의 런던 아이

영국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 중이던 지난해 12월 29일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런던 유스턴 역에서 승객들이 열차운행 게시판을 쳐다보고 있다.

영국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 중이던 지난해 12월 29일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된 런던 유스턴 역에서 승객들이 열차운행 게시판을 쳐다보고 있다.

설날이나 추석 명절 연휴 때마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귀향길 기차표 예매 관련 뉴스가 쏟아진다.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매진됐다는 소식이 주를 이룬다. ‘철도의 나라’라 불리는 영국의 연휴 땐 어떨까.

영국에서 일 년 중 가족이 함께 보내는 연휴는 크리스마스가 유일하다. 영국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연휴는 한국의 설날과 추석 연휴를 합친 정도로 큰 명절이나 다름없다. 크리스마스가 한 해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을 정도다. 영국에서는 12월 23일께부터 다음 해 1월 2일까지 대부분 일을 하지 않는다. 학교는 방학이고, 기업들은 업무 시간을 단축하며, 나라 전체의 절반 이상이 문을 닫는다. 그 시간 동안 가족을 방문하며 보낸다. 영화나 크리스마스 카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처럼 영국의 크리스마스 연휴는 사람들이 런던 등 대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있는 가족들에게 여행을 가는 행복한 시간이다.

열차 1시간 지연돼 점심 약속 못 지켜

하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땐 귀향길이 평소보다 더 어려웠다. 영국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과거에 볼 수 없던 격심한 노동쟁의에 시달리고 있다. 영국의 교통 인프라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매우 노후화해서 거의 매일 열차가 지연되거나 고장 나고 있는데 노조 파업이 겹쳐서 열차 이용이 더욱 불편했다.

지난 12월과 1월 파업에는 버스 운전사, 철도 노동자, 고속도로 노동자, 수화물 취급자 등이 참여했으며 사상 처음으로 간호사, 구급차 운전사, 우편 노동자, 보건 노동자까지로 확대됐다. 파업의 계기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최근 보수당 정부에서 빠르게 증가하는 생활비와 낮은 임금 사이의 격차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불과 두 달 사이에 총리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보리스 존슨에 이어 리즈 트러스가 9월 취임했으나 한 달여 만에 물러났고 리시 수낵이 총리가 됐다.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지난해 10월 11.1%를 기록했고 11월에는 10.7%로 소폭 하락했다. 그러나 생활비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4~5%의 일반적인 임금 인상률은 물가 상승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 됐다. 임금 인상률을 높이기 위한 협상이 수포로 돌아가자 노조는 마침내 파업을 결정했다.

철도해운노조(RMT)가 파업에 들어간 가운데 지난해 12월 16일 런던의 한 역 플랫폼에서 승객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철도해운노조(RMT)가 파업에 들어간 가운데 지난해 12월 16일 런던의 한 역 플랫폼에서 승객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AP=연합뉴스]

기차와 버스 파업으로 인해 노후한 철도망과 서비스 개선에 대한 투자 실패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1990년대 철도 민영화 이후 상황은 더 나빠졌으며 영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영국의 철도 민영화는 1994년에 추진되기 시작했다. 민간 기업들이 직접 열차를 생산하고, 선로를 유지하고, 열차를 운행했다. 하지만 결국 일부 기능은 정부 통제하로 다시 돌아왔고, 선로 유지보수는 현재 국영 네트워크 레일(Network Rail)에서 관리하고 있다.

당시 영국 정부는 민영화를 통해 사기업 간 경쟁을 촉발시켜 운임을 낮추고 서비스 품질을 높이려고 했다. 초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수년에 걸쳐 철도이용료가 비싸졌고 민간 기업들이 자사의 수익 증가에 집중하면서 서비스가 나빠졌다.

영국 기차표는 매우 비싼 편이다. 열차 티켓 가격은 구매 시점에 따라 달라지는데, 몇 달 전에 예매하면 저렴하고 당일에 사면 매우 비싸다. 이용하는 열차 시간 또한 가격에 큰 영향을 준다. 통근 시간에 열차를 이용하면 같은 티켓도 훨씬 더 비싸다.

영국 1825년 열차 노선 개통 ‘세계 1호’

지난 7일 런던 리버풀역에 설치된 철도파업에 관한 안내판.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7일 런던 리버풀역에 설치된 철도파업에 관한 안내판. [로이터=연합뉴스]

예를 들면, 수원~서울 통근과 비슷한 베이싱스토크(Basingstoke)~런던 왕복 기차표의 가격은 현재 기준 약 53.40파운드(약 8만원)다. 매일 출퇴근을 한다면 시즌권을 구매하여 조금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이는 한 달 기준 최소 480파운드(약 73만원) 정도다.

이렇게 출퇴근을 위해 꽤 비싼 비용을 들인다고 해도 열차가 제시간에 운행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영국에서 열차 지연은 매우 흔한 일이라서 사람들은 통근 시간에 30분 이상 더 걸릴 것을 예상해서 움직인다.

영국에선 열차 플랫폼에 조금만 서 있어도 다양한 이유로 열차가 지연됐다는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신호 고장, 레일 문제, 선로 위의 낙엽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승무원 부족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됐다.

지난 12월 런던을 방문했을 때 나는 툴스힐(Tulse Hill)역에서 추위에 떨며 30분을 서  있었다. 열차 선로의 일부가 파손돼서 모든 열차가 운행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안내 방송을 듣고 열차 이용을 포기한 후 버스를 타러 나왔지만, 결국 예정보다 한 시간이 더 늦어져 점심 약속에 갈 수 없었다.

그 며칠 전에도 핀즈버리공원(Finsbury Park)에서 레드힐(Redhill)까지 이동할 일이 있었다. 원래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만 열차가 한 시간 지연되는 바람에 차가운 비가 내리는 플랫폼에 서서 열차를 기다려야 했고, 결국 월드컵 16강전 한국과 브라질 경기의 첫 10분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의 이유는 철도 민영화에만 있는 건 아니다. 영국 교통 시스템 자체가 노후했고, 기술이 낙후한 것도 이유다. 영국의 철도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25년 첫 열차 노선이 개통됐다. 현재 사용되는 선로의 대부분은 70년 이상 된 것이다. 영국은 또한 많은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더 많이 열차를 운행한다. 열차에 많은 문제가 있는데도 매일 50만 명 이상이 열차로 이동한다. 이들은 광범위한 열차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영국 내 열차 이용 수요가 높은 만큼 많은 열차가 운행된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스페인, 스위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노르웨이의 열차 운행량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열차가 운행된다.

열차 선로의 노후화와 많은 운행 횟수 등으로 인해 열차 선로에 많은 손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도 자주 그리고 장시간 지연되는 열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3일 런던 워털루역에 “플랫폼 일부가 일시적으로 폐쇄된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바리케이드 앞에 서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3일 런던 워털루역에 “플랫폼 일부가 일시적으로 폐쇄된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바리케이드 앞에 서 있다. [EPA=연합뉴스]

영국 정부 부처에 근무하는 쿠마르(Kumar)는 런던에서 약 150㎞ 떨어진 도시인 버밍엄에 살고 있다. 그는 일주일에 며칠씩 일 때문에 런던에 가서 저렴한 호텔에 묵는다. 고속 열차를 타면 한 시간이면 버밍엄에서 런던으로 이동할 수 있어 통근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편도 이용료가 70파운드(약 10만5000원)나  되기  때문에 런던에서 묵는 게 낫다. 비싸고 지연이 잦은 열차를 이용하는 걸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쿠마르는 “요즘 버밍엄에서 런던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정말 끔찍하게 힘들어요. 안타깝지만 지금 영국의 많은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는 기관사들이 버밍엄에서 런던으로 가는 고속열차 회사와 대규모 쟁의 중이라는 겁니다. 여행 3일 전까지도 기차표를 예약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행 계획을 세울 수 없어요. 기차를 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미리 계획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번역:유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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