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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 대출 탕감’이 불안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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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지난해 태풍 힌남노로 인한 폭우에 포항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침수된 사고로 주민 7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은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기엔 역부족이지만 시민안전보험에 가입한 포항시는 유족에게 최대 2000만원의 보험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엄마와 헤어져 주차장을 탈출하다 안타깝게 숨진 14살 소년이다.

양육 부담 완화 목적이라지만 #‘출산=빚 탕감’ 수단 될 수도 #저출산 대책 치곤 위험성 커

 이런 예외가 생긴 건 미성년자의 사망보험 가입을 금지한 상법 732조 때문이다. ‘15세 미만자 등의 사망을 보험사고로 한 계약은 무효로 한다’는 규정이다. 해당 조항은 보험금을 노리고 미성년자에 위해를 가하거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범죄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남성이 보험금 1000만원을 받으려 자녀의 손가락을 자른 범죄가 발생한 게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보험금을 노리고 어린 자녀에게 해를 가하는 범죄가 이어지자 2009년 금융감독원은 미성년 사망보험을 금지했다. 자식의 목숨값과 맞바꾼 보험금을 타려는 인면수심의 부모를 막기 위해서다.

 미성년자의 사망보험 가입 금지 조항이 문득 떠오른 건 최근 논란이 빚어진 이른바 ‘출산 대출 탕감’ 때문이다.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최근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출산 시 주택담보대출이나 전세자금대출 원금을 탕감해주는 방안을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목돈을 초저리로 장기 대출해주고, 출산한 자녀 수에 따라 원금의 일부 혹은 전부를 탕감해주는 ‘헝가리 제도’를 응용해보자는 이야기다. 헝가리에서는 해당 제도가 나름 출산율을 끌어올리는 정책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주택 구입과 전세자금 마련 등에 어려움을 겪는 신혼부부가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출산을 망설이지 않도록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한다. 정쟁의 영역으로 밀려나 본질에 대한 논의는 휘발된 듯하지만 이 주장, 조금 과장해 말하면 무서웠다. 아이를 낳는 것이 빚을 갚기 위한 수단으로 치환되는 그 아찔함 때문이다. 탕감되는 대출액이 한 생명의 몸값으로 계산될 수도 있다는 걱정이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선의의 발로였더라도, 이 주장이 내포한 위험은 여기에 있다.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원회 신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원회 신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출산 대출 탕감과 관련한 대부분의 반응은 ‘한 아이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많은 정성과 노력과 에너지, 사회적 비용 및 경제적 비용 등을 감안한다면 대출 탕감 정도로 출산을 결심하는 부모가 얼마나 되겠냐’가 주를 이뤘다. 모든 아이를 걱정 없이 키울 수 있는 사회 및 제도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는 판단이다. 그렇다면 출산 대출 탕감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정부도 관련 정책 기조와는 거리가 있다며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출산 대출 탕감’이 안고 있는 불온한 요소는 하나둘이 아닐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며 부모의 빚을 갚아주는 선물을 주는 자녀가 축복으로 여겨지며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을까. 지나친 기우일지 몰라도 ‘출산 돌려막기’라는 무시무시한 신조어마저 등장하지 않을까. 출산이 빚테크의 새로운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건 아닐까. 해서는 안 될 생각과 가정이 꼬리를 물게 됐다.

 형평성 논란도 불거질 수 있겠다 싶다. 관련 기사에는 이미 출산한 경우는 어떻게 할 거냐, 불임 부부의 대출은 어떻게 되냐는 등의 댓글도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미 각자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재난지원금 지급 당시 빚어졌던 혼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산 대출 탕감을 둘러싼 다양한 주장도 난무할 수 있을 터다.

 저출산 문제 해결은 쉽지 않은 과제다.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지만 나아지지 않는 상황만 봐도 그렇다. 극약 처방이 필요하단 생각에 출산 대출 탕감이라는 방안까지 고민했을 수도 있다. 정부의 선 긋기 등으로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더 두려운 건 이 논의나 제안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많은 그 어떤 선거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명목에, 어쩌면 다음에는 선뜻 출산 대출 탕감에 동의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밀려온다.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도, 성실한 채무자를 우롱하는 것이란 목소리에도 출산 대출 탕감까지 이어진 정치인의 ‘대출 탕감 카드’는 힘이 세기 때문이다.  아이의 탄생이 대출 탕감으로 이어지는 논리의 흐름은 지금이야 소름끼치지만,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둔감해지기도 쉬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