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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하노이 회담 결렬 후 신년사 연속 생략…위기상황 고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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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라진 북한 신년사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

북한은 안갯속의 나라다. “조직의 비밀은 생명”이라고 할 정도로 속내를 감추는 게 북한이다. 대외 활동을 하는 인사들은 가명을 쓰는 경우가 많았고, 가족이나 개인사에 대해 물으면 얼버무리거나 둘러댄다. 누군가 좌천되거나 면직됐다는 얘기가 들려 “잘 있냐”고 물으면 항상 “잘 있습네다”라고 답한다. 솔직하면 나중에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뿌리 깊은 듯하다.

위기 때 마다 사라지는 북한 신년사

북한이 매년 1월 1일에 발표해온 신년사는 북한의 한 해 목표와 정책을 대내외에 공개함으로써 북한을 들여다보는 창문 역할을 해왔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육성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꺼렸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동사설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신년사든 공동사설이든 내용이나 분량은 차이가 없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집권 이듬해인 2013년부터 1시간 안팎의 육성 신년사를 했다.

신년사 작성을 위해 노동당에는 상무조(TF)가 꾸려지고, 모든 조직이 매년 12월 한 달 내내 총화(결산)와 다음 해 계획 수립에 몰두한다. 모든 조직과 단위별로 한 해 거둔 성과와 부족한 점을 평가해 상부에 보고하면 이를 취합해 새해 신년사에 반영했다. 그렇게 작성된 신년사의 제목은 그해 북한이 달성해야 할 핵심 키워드가 됐고, 신년사 발표는 북한으로선 매우 비중이 큰 정치 일정이었다.

김정은 집권후 신년사 네 번 빠져
올 전원회의 보도량 작년 3분의 2
대남 정면대결 선언…도발 긴장감
이럴 때 신중한 ‘안개 전략’이 필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9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 집무실로 추정되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신년 사를 발표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9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 집무실로 추정되는 사무실 소파에 앉아 신년 사를 발표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그런데 최근 북한에서 신년사가 자주 사라진다. 북한은 2020년 신년사를 2019년 12월 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7기 5차) 보도문으로 대신하더니 2021년엔 264자짜리 인민들에게 보내는 김 위원장의 친필 연하장만 발표했다. 지난해와 올해 신년사 역시 각각 2021년과 지난해 말 열린 ‘전원회의에 관한 보도’로 대신했다. 김 위원장 집권 이후 11번 맞은 새해 가운데 올해까지 4번 신년사가 사라졌다.

북한은 과거에도 신년사를 내지 않은 적이 있다. 그러나 매우 드물었고, 심지어 6·25 전쟁 중에도 신년사를 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의 잦은 신년사 ‘소멸’은 이례적이다. 김 위원장의 속내가 신년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느낌이다.

김일성 시대 신년사가 나오지 않은 일은 북한 최대 정치 투쟁 사건인 ‘8월 종파사건’이 벌어진 다음 해인 1956년 한 번이다. 김일성 주석의 유일체제가 마무리돼 가면서 막바지 권력 투쟁이 있었던 66년부터 68년까지는 노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또 전쟁에서 밀리던 52년과 53년엔 축하문으로, 옛 소련의 체제 전환이 한창이던 87년엔 김 주석의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이 신년사가 됐다.

비록 공동사설이라는 형식을 취했지만, 김정일 시대에도 신년사가 빠진 적은 없다.

2019년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베트남 하노이)이 결렬된 뒤 신년사가 사라진 점이 눈에 띈다. 아버지(김정일 국방위원) 사망으로 20대 젊은 나이에 권력을 물려받은 김 위원장은 고모부 장성택 일당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 등으로 내부 정비를 마친 뒤 미국과 담판에 나섰다. 이른바 ‘단번 도약’을 위해 핵 보유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내보였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에 합의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대업적’이었다. 기세가 오른 김 위원장은 2차 정상회담이 열리는 하노이로 출발하는 장면을 북한 주민들에게 모두 공개하고, 환송 속에 열차에 올랐다. 그러나 2차 회담이 결렬됐고, 북·미 관계가 꼬였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더욱 촘촘해지고, 자연재해가 연이어지면서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연상시킬 정도로 경제가 어려워졌다. 이에 더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을 우려해 스스로 국경을 봉쇄한 탓에 중국과 러시아 등 ‘뒷배’들의 지원도 크게 줄었다. 주민들에게 제시할 장밋빛이 흐려지고 장엄한 앞날 구상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 1일 자 노동신문에 실린 노동당 전원회의 보도는 지난해(1만8738자)보다 3분의 1 정도 줄어든 1만2827자였다. 내용도 과거 산업별로 조목조목 제시했던 새해 과업을 생략하고 뭉뚱그렸다.

2인자도 사라졌다

김 위원장은 2인자 교체 카드도 꺼냈다. 노동신문이 1일 자에 보도한 인사에서 후계자 시절 자신의 개인 교사 역할을 했던 박정천 노동당 비서를 해임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정천은 김 위원장 집권 이후 총참모부 포병국장,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을 거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등에 올랐다. 김 위원장 대신 미사일 발사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등 군사 분야 2인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지난 연말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일각에선 박정천이 전원회의 첫날(지난달 26일) 발생한 한국 무인기 침투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해임됐다고 관측한다. 그러나 군사작전을 총괄했던 이태섭이 총참모장에서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사회안전상으로 자리를 옮기고, 국방상(장관) 등 군 수뇌부 인사도 대대적으로 있었다는 점에서 군부 다잡기 차원에서 인사를 했다는 국가정보원 판단이 더 일리 있다.

김 위원장은 또 미국에 두 차례 특사로 파견했고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진두지휘했던 김영철 전 노동당 비서를 정치국에서 내보냈다. 대외·대남 분야의 2인자 역시 물러난 것이다. 이와 함께 역대 권력 서열 2위인 당 조직 비서(조용원)를 3위로 내려 앉히고, 내각 총리를 서열 2인자로 끌어올렸다. 대내, 대외, 군사 모든 분야에서 2인자를 교체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과 미국을 향해선 초강경 입장을 천명했다. 북한은 지난해 중반부터 이미 한국과 미국의 군사 훈련에 즉각 미사일 발사로 응수하는 ‘맞짱 전략’을 시작했다. 이번에 김 위원장 입으로 직접 강대 강, 정면대결을 강조하고 이를 대내외에 강조했다는 건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더 거세질 것을 보여준다.

마주보며 달리는 남북

국제정치학 이론 가운데 외교가 국내 상황에 좌우된다는 연계이론(Linkage theory)이 있다. 내부의 시선을 모아 결속을 도모하려 시도하는 탓에 내부 불안정이 대외적 갈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이론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11일 진행한 외교부·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이 증대할 경우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또 북한의 무인기 침범에 대해 ‘대량 응징 보복’과 9·19 군사합의 파기 가능성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의 힘에 의한 평화와 김 위원장의 정면대결 천명은 양측이 마주 보고 달리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모양새다. 한·미 군 당국은 오는 3월 연합훈련을 예정하고 있다. 북한 핵 위협 대비 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하고, 규모를 축소했던 미군 병력을 늘리고 실기동 연습도 확대한다고 한다.

3월과 4월, 한반도 긴장이 크게 높아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정면대결을 천명한 북한이 한·미 군사훈련에 맞춰 다양한 도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만에 하나 실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면 그로 인한 피해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한 신중함이 필요한 때다. 우리의 패를 낱낱이 보여주는 식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북한처럼 ‘안개주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남이든 북이든 최고지도자의 발언을 바로 잡을 사람이 없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북한 신년 경축무대에 등장한 산타

북한이 지난 1일 새해를 맞아 진행한 2023년 신년경축 대공연에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어린이가 등장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1일 새해를 맞아 진행한 2023년 신년경축 대공연에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어린이가 등장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1일 새벽 진행한 신년 맞이 공연에 산타가 등장했다. 북한이 매년 새해를 맞아 대규모 공연을 진행하는데 ‘2023년 신년경축 대공연’에 참석한 어린이가 산타 복장을 하고 무대에 선 것이다. 신년 공연에 성탄절의 상징인 산타가 등장한 것도 낯설지만, 기독교와 성탄절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 산타 복장이 눈길을 끌었다.

북한 문화 전문가인 전영선 북한연구학회장은 “김정은 국무위원이 집권한 이후 북한 공연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며 “신년 공연도 한복을 입고 실내에서 진행하던 형식에서 야외 공연으로 바뀌었고 화려한 조명을 동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2~3년 동안 눈사람 등 인형에 산타 옷을 입히거나 등장하는 가수가 빨간색에 하얀 목도리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출연진이 산타복장을 한 건 이례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은 성탄을 “성인(聖人)의 출생”으로, 성탄절을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날을 기념하여 지내는 명절. 12월 25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도 크리스마스, 즉 성탄절을 인지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북한의 달력에는 어디에도 성탄절을 표시하지 않고, 실제로 이날을 즐기는 사람들은 없다고 한다. 익명을 원한 고위 탈북자는 “북한에서 12월 24일은 성탄 전야가 아닌 김정은 위원장의 할머니인 김정숙의 생일을 기념한다”며 “성탄을 즐기는 경우는 없었다”고 전했다. 특히 북한은 2020년 12월 서방 문화와 한국 문화의 유입을 막기 위해 반동사상 문화 배격법을 제정하고, 한국 문화를 즐기는 이들을 처벌하고 있다.

이를 고려하면 서양 문화인 산타의 등장과 확산은 혼란스런 단면이란 지적이다. 전 회장은 “북한에도 산타클로스라는 단어가 있지만 유명무실하다”며 “서양문화 접근을 금지하되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산타클로스를 통해 ‘세계를 보라’는 김 위원장의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