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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차이나 안혜리의 시선

창비와 김어준이라는 권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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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창비(창작과비평)와 김어준. 지난 세기부터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권력을 상징해온 두 키워드가 2023년 시작부터 사람들 입에 나란히 오르내리고 있다. 한쪽은 돈도 안 되는 논란으로 한숨짓고, 다른 한쪽은 쏟아져 들어오는 돈 앞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표면적으론 이처럼 양극을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이벤트는 결국 같은 맥락 위에서 봐야 한다. 그들만의 작은 왕국을 구축한 편향적 권력의 작동 방식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해악 말이다.

방송 하차 후 돈벼락 맞은 김어준 #장강명 통해 사실 바꾸려한 창비 #선동과 진실 조작 시도에 우려

TBS에서 하차한 김어준은 9일 새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캡처

TBS에서 하차한 김어준은 9일 새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캡처

먼저 6년 3개월 만에 드디어 TBS(교통방송) 라디오 진행자에서 하차한 김어준 얘기부터 해보자. TBS에서 진행하던 같은 시간에 같은 이름을 내건 새 유튜브 채널로 지난 9일 시작한 김어준 방송은 당장은 모두에게 윈윈이다. 방송 첫날부터 슈퍼챗 전 세계 1등, 사흘 만에 구독자 87만명을 넘기며 돈벼락을 맞고 있는 김어준이 가장 큰 수혜자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선동으로 그렇게 쉽게 큰돈을 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긴 하지만 선량한 시민의 아까운 세금이 아니라 맹목적 추종자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 굳이 안타까워할 필요는 못 느끼겠다. 무엇보다 그에게 비판적인 사람들로선 서울시의 재정 지원으로 운영하는 방송국에서 라디오 전파라는 공공재를 점유하며 정치적 편향성을 뛰어넘는 각종 음모론의 생산기지 노릇을 해온 김어준의 퇴출 자체가 큰 선물이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론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외면하기 어렵다. 최다 제재 기록을 세우며 법정 제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이미 보였던 김어준이다. 이젠 아예 방송심의라는 최소한의 족쇄마저 풀어버렸으니 가뜩이나 거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로 둔갑시켜온 그의 재주가 어떤 혼란을 불러올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짓 선동에 휘둘려 대통령궁을 비롯해 의회와 대법원까지 짓밟으며 민주주의를 유린한 최근의 브라질판 대선 불복 폭동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극성 팬덤을 확보한 음모론자가 끼치는 폐해는 결국 온 사회가 떠안을 수밖에 없어서다.

지난 2015년 소설가 신경숙 표절과 관련한 문제제기 후 열린 토론회. 당시 신경숙 작가 책을 출간했던 창비는 최근 장강명 작가가 이 부분을 언급하자 문장 수정을 요구해 논란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지난 2015년 소설가 신경숙 표절과 관련한 문제제기 후 열린 토론회. 당시 신경숙 작가 책을 출간했던 창비는 최근 장강명 작가가 이 부분을 언급하자 문장 수정을 요구해 논란을 일으켰다. 중앙포토

이번엔 창비의 장강명 작가 글 검열 논란이다. 과정을 상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단순히 출판사가 몇몇 문장을 손보려다 작가와 의견이 갈려 잡음이 생긴 게 아니다. 이보다는 조작한 진실을 제3자가 쓴 기록으로 남기려는 불순한 의도를 품은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살만하다. 발단은 이미 보도된 대로 '신경숙의 표절을 창비가 궤변으로 옹호하며 표절 기준을 무너뜨리려 한 것에 대해 한국작가회의는 끝내 아무 논평도 내지 않았다'는 문장 하나였다. 앞서 작가가 웹진으로 공개한 글에도 포함된 문장이다. 정 동의할 수 없다면 책 마지막에 출판사 입장을 별도로 밝히거나 편집자 각주를 달 수도 있는데 그 대신 본문 한가운데에 '표절에 대해 창비와 나의 입장은 다르다'는 문장을 넣으라고 작가에게 요구했다. 표절이라는 건 장 작가의 일방적 주장이고 표절이 객관적 사실로 드러난 건 아니라는 뉘앙스를 작가 본인의 글로 남기려 한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는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는 당 구호 그대로 왜곡된 사실을 역사로 만들기 위해 신문·잡지 등을 고쳐 쓰는데, 이것과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김어준식 선동만큼 위험해 보이는 이유다.

저자와 편집자 간의 3차에 걸친 교정까지 모두 끝난 마당에 왜 출판사 경영진이 무리하게 이런 시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난 2015년 신경숙 작가의 표절로 세상이 떠들썩했을 때 19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한국작가회의의 전신) 결성을 주도하며 비단 문단뿐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창비의 정신적 지주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당시 편집인)가 보였던 입장과 관련된 게 아니냐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당시 백 교수는 유사성은 인정하면서도 "표절로 단정 지을 수 없다"며 부인했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건이 불거진 후 비슷한 사례가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2021년 창비 편집주간을 지낸 한 역사학자의 책 서평을 부탁받았던 강진아 한양대 교수는 당시 서평과 관련한 한 기고 글을 통해 '중국 비판이 집중된 부분에 대해 반박과 수정 요청을 받았다, 진보 지식인 사회에서 중국론이 가지는 민감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썼다. 중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창비가 검열했다는 이야기다. 창비가 점유하고 있는 문화권력을 감안할 때 이런 식의 공론장 왜곡이 더 많지 않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이미 지나간 창비의 망신과 김어준의 하차, 대수롭지 않아보이는 이벤트에 자꾸 신경이 쓰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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