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처자" 한마디만 했다…日교도관 놀란 안중근 옥중생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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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남산 안중근 기념관에 있는 안중근 의사 조각상. 중앙포토

서울 남산 안중근 기념관에 있는 안중근 의사 조각상. 중앙포토

“안중근의 각오는 극히 완강했다. (…) 처자의 흑백사진을 들이대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으며 물어보면 천천히 “그렇다, 내 처자임에 틀림없다”라고 한마디 할 정도였다. 골육인 두 동생을 만나 어머니의 결의를 들었을 때는, 아무리 강한 그도 과연 잠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곧 감정을 삼키고 한마디도 약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안 의사 감옥생활 적은 일본 교도관 기록 첫 공개
1910년 1월 교정협회 잡지서 사형 직전 면모 확인
“안중근은 큰소리처럼 붓끝에도 오기가 잔뜩 담겨”
안 의사 지켜본 간수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감탄

 안중근(1879~1910) 의사의 뤼순(旅順) 감옥 수감 시절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본 측 사료가 새로 공개됐다. 일본교정협회가 발행하는 ‘감옥협회잡지’ 1910년 1월 20일자(제23권 제1호)에 실린 ‘이토(伊藤)에게 흉격을 가한 안중근의 소식’이라는 3쪽 분량의 문서에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안 의사는 흑백 가족사진을 앞에 두고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의연한 태도를 견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장부’ 안중근의 면모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1909년 11월 3일부터 1910년 3월 26일까지 총 144일간 뤼순 감옥(공식명칭 관동도독부 감옥소)에 갇혔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 의사의 마지막 행적을 다룬 뮤지컬 ‘영웅’과 동명의 영화도 현재 공연·상연 중이다.

1910년 1월 20일 발행한 일본감옥협회 잡지 표지. 사진 김월배

1910년 1월 20일 발행한 일본감옥협회 잡지 표지. 사진 김월배

 이번 자료에 따르면 “(안중근은) 입으로 큰소리하는 것(廣舌)처럼 붓끝에도 역시 오기가 잔뜩 담겨” 있었다. ‘큰소리(廣舌)’와 ‘오기’는 일본인 관점에서 ‘수감수’ 안 의사를 바라본 단어다. 그만큼 안 의사의 기백이 대단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그는 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 역사』와 미완의 유작 『동양평화론』을 쓰고 있었다. ‘위국헌신 군인본본’(爲國獻身 軍人本分)’ 등 유묵(遺墨) 200여 점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안 의사의 옥중 생활은 『안응칠 역사』와 일본 외무성의 ‘이토공 만주 시찰 일건’ 등을 통해 그간 제법 알려졌으나 새로 발견된 자료는 안 의사의 최후를 직접 지켜본 여순 감옥 교도관(작성자 미상)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가 있다.
 해당 자료는 안 의사 연구, 유해 찾기에 전념해온 김월배 중국 하얼빈 이공대 교수가 2018년 도쿄 소재 일본교정협회 도서관에서 찾아냈다. 김 교수는 “자료 수집 차 방문한 일본 법무성 법무도서관에서 일본교정협회 전시물을 발견했고, 이후 바로 교정협회 부속 도서관에서 잡지를 검색하며 이번 자료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번 사료의 역사적 가치와 발견 과정을 정리한 글을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안중근기념관이 발행하는 반연간지 ‘대한국인 안중근’ 최근호(2022년 12월)에 기고했다. 그는 “수감 당시 안 의사의 상황과 다른 의거자, 일본 측의 공판 준비 모습이 두루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안중근 의사의 뤼순 감옥 생활을 기록한 일본감옥협회 잡지 1910년 1월 20일자. 붉은색 박스로 표시한 부분이 안 의사 관련 내용이다. 사진 김월배

안중근 의사의 뤼순 감옥 생활을 기록한 일본감옥협회 잡지 1910년 1월 20일자. 붉은색 박스로 표시한 부분이 안 의사 관련 내용이다. 사진 김월배

 알려진 대로 안 의사는 감옥에서 국사범 대우를 받았다. “식사는 흰쌀밥으로 바뀌고 침구도 충분히 제공되는 데다가, 차와 담배까지 허락되었으며, 운동은 물론 고향의 가족과 편지 왕래도 자유로워서, 명목상으로는 보통의 형사 피고인이지만 실제로는 국사범과 동격으로 취급되었다”고 적혀 있다. 일본 교도관들도 안 의사의 충정과 애국정신을 인정했다는 증거로 풀이된다.
 해당 기록은 『안응칠 역사』의 서술과도 부합한다. 안 의사는 자서전에서 “일주일마다 한 차례 목욕할 수 있게 했다”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감옥에서 나오게 했다” “아침·점심·저녁 세 끼니의 밥을 흰쌀밥을 먹게 했다” 등 당시 일본인 간수와 검찰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일제는『동양평화론』 완성을 조건으로 항소를 포기한 안 의사와의 약속을 어기고 사형 선고 한 달여 만에 사형을 집행했다.
 이번 자료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여럿이다. 당시 공판 준비 서류가 약 76㎝에 이르렀고, 안 의사 집안의 재산이 한 해 30가마 정도였다고 나와 있다. 또한 1909년 3월 안 의사가 단지 동맹을 맺으며 잘라낸 왼쪽 무명 손가락이 그해 가을까지 남아 있었다고 기술했다. 안정근·안공근 두 동생이 감옥에 면회온 사실과 형 안 의사를 만난 그들의 반응도 명기돼 있다.
 안 의사의 거사 소식을 들은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심정도 묘사돼 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 의사가) 어렸을 때부터 좀 너무 대담했기 때문에 아마 방안에서 편히 죽지 못할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 교도관은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며 좀 어폐가 있기는 하지만 감탄하는 사람도 있다”고 기록했다.

1910년 1월 2일 기념 촬영한 일본 감옥협회 회원들. 사진 김월배

1910년 1월 2일 기념 촬영한 일본 감옥협회 회원들. 사진 김월배

 김월배 교수는 “이번 자료를 통해 당시 일본에서도 안 의사의 수감 상태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또 안 의사의 처우에 대해 상당히 고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안응칠 역사』『동양평화론』의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토를 처단한 권총도 소재 불명”이라며 “안 의사가 러시아에서 일본 총영사관에 인계될 당시 ‘물품 인수·인계 목록’에 관련 물품이 16가지나 되지만 안 의사의 유해 매장지 관련 기록은 아직 못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중근기념관 이주하 학예부장은 “안 의사의 감옥 생활은 안 의사 자서전과 일본 외무성·검찰 문서를 통해 많은 부분 밝혀졌지만 110여년 만에 발견한 이번 자료는 안 의사를 가까이서 지켜본 교도관들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하위직 공무원인 교도관들의 소식지에서도 안 의사가 거론될 만큼 당시 안 의사는 일본인 사이에서도 대단한 관심을 모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안 의사의 면모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새로 공개된 안 의사 자료 전문 번역본을 기사 뒤에 첨부합니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이토(伊藤)에게 흉격을 가한 안중근의 소식(전문)

신중에 신중을 더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검찰사무도 약 두 달의 기간을 들여 이제 종료되었다. 예심 판관의 손으로 넘어갈 안중근 이하 9명의 흉한의 옥중 상태는 어떠한가 하면, 식사는 흰쌀밥으로 바뀌고 침구도 충분히 제공되는 데다가, 차와 담배까지 허락되었으며, 운동은 물론 고향의 가족과 편지왕래도 자유로워서, 명목상으로는 보통의 형사 피고인이지만 실제로는 국사범과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어, 그들이 역시 문명 제도라며 만족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편지왕래라고 하면 9명 중 한자의 소양이 있는 자는 약 반 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김형재(金衡在)인데, 그는 하얼빈에서 간행되는 러시아 동철도기관 한자 신문 ‘원동보(遠東報)’의 기자이다. 안중근도 가끔은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였으나 입으로 큰소리를 하는 것(廣舌)처럼 붓끝에도 역시 오기가 잔뜩 담겨 있다. 불기소가 되는 자가 많다는 설이 있고, 이형(異形)의 권총을 소지하고 있는 조도선(曹道先)은 총을 소지하는 것은 호신용으로 러시아 거주자의 일상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중근과 동형의 권총을 소지한 우연준(禹連俊·우덕순의 가명)은 단순히 안(안중근)을 도우려고 했을 뿐, 절대로 처음부터 동맹에 가입한 것은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는 것 같다.
예심 수리(受理)부터 개정(開廷)까지 겨울 휴가를 포함하여 약 2주일로 봐도 되겠지만, 서류를 쌓아놓은 높이가 2척5촌(약 76㎝)이나 되어서 공판 전(원문에는 公犯前, 오기로 보임, 일본어로는 발음이 같음)에 변호사들이 그것을 등사하고 번역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공판정(公判廷)은 고등법원의 그것을 빌려 쓸 수 있도록 이미 작은 설비(小設備)를 갖추어 두어서 조금 무리를 하면 3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안중근의 각오는 극히 완강하여, 여순까지 목숨을 용케 부지하였다고 하며 처자의 흑백사진을 들이대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으며 물어보면 천천히 “그렇다, 내 처자임에 틀림없다”라고 한마디 할 정도의 인물이다. 골육인 두 동생을 만나 어머니지의 결의를 들었을 때는, 아무리 강한 그도 과연 잠시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곧 감정을 삼키고 한마디도 약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재산은 한 해에 쌀 30가마니 정도의 수입이 있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서북학회 회원이라는 것 외에 굳이 직업을 찾자면 폭도한이었다. 작년 가을 이후 행방불명이 된 손가락(指)은 그 무렵까지는 무사했다고 할 수 있다. 동맹단의 근거지는 블라디보스톡이라는 설이 정곡을 찌르는 것 같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하 현 가족 모두 가톨릭 신도이며 이번에 면회를 오는 두 동생도 역시 독실한 신도이다. 수형(受刑) 때 올 것이라고 어머니가 이야기한 ‘신부’인 선교사는 순전히 종교적인 것이라면 허락을 받을 것이다. 두 동생의 면회는 내일 두 번째 허락받을 것이겠지만, 그들은 오늘 지나 숙소로 옮겼다.
정근은 침착하고 냉정한 편으로, 처음으로 변고를 들었을 때도 의외로 당황하지 않았다. 막내 동생인 공근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떨어지며 “아이고 아이고” 소리 내어 울었다. 하지만 큰형을 끔찍이 생각하여, 평소 중근을 제2의 아버지로 믿고 그 일지에는 장형(長兄)의 두 글자를 기입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약 마흔일곱, 여덟 살로, 관청으로 불려나와 사실을 들었을 때 태연자약하게 “만약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는 차제로, …… 아무래도 어렸을 때부터 좀 너무 대담했기 때문에 아마 방안에서 편히 죽지 못할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했다. 중근의 결심은 이 어머니도 이 동생들도 전혀 몰랐겠지만, 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며 좀 어폐가 있기는 하지만 감탄하는 사람도 있다.
(※번역 김효순 고려대 글로벌일본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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