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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타인의 미래에 끼어드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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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힘’에 대해 고찰하는 글이다. 힘은 삶에서 늘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특히 전쟁과 관련될 때는 타인의 미래를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즉 나의 힘은 적군의 미래를 ‘죽음 그 자체’로 만들어버린다. 그 앞에서 군인들은 다른 여지를 상상할 도리가 없다.

평범한 우리도 종종 타인에게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이 부드러우면 세상은 꽃과 열매를 피워내지만, 상대를 두려움에 꼼짝 못 하도록 붙드는 힘도 있다. 얼마 전 지인 A는 내게 “당신은 얼마 안 있어 갱년기를 겪을 것”이고 그러면 삶의 전환점을 맞을 텐데, “영적 세계로 건너오지 않으면 전 재산을 잃고, 죽음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달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흔히 영성은 인간 이성보다 더 상위이자 궁극의 범주로 여겨진다. 이 점은 쉽게 수긍되는바 이성은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령 『근본개념들』에서 하이데거가 인간 너머의 존재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것은 익숙한 풍경이다. 하지만 상대방 미래를 투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두려움을 일으키는 A의 말은 결국 궤도에 오르지 못한 채 소멸한다. 꿈은 우리의 현실보다 강력한데, 겁주는 미래는 우리 꿈과는 관련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만 내세우는 교만함
어른들의 한마디 정말 도움될까
천천히 기다리는 마음이 중요해

며칠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한 강사의 말 역시 타인의 미래에 전적으로 개입하는 유였다. 그는 자신에게 청년 실업을 해소할 묘법이 있다고 했다. “싹 다 공장으로 보내면 돼요.” 그의 칼 같은 언어는 타인의 미래를 산업혁명기의 빵과 교환되는 공장 속으로 되돌려놓아 더 나은 앞날을 그리던 청년들은 취업의 사다리에 매달린 채 떨어야 했다. 그는 청소년을 위한 대책도 내놓았다. 10대들이 공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자살률도 높으니 “학원을 다 끊으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고 했다.

청중을 휘어잡는 그의 무기는 획일성, (다른 의미에서) 사다리 걷어차기, 먹고사니즘이었다. 그가 제시한 미래의 답안은 모두 과거 회귀적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 탓에 혹은 가부장적 사고로 자신을 교육하지 않았던 부모에게 딸들은 얼마나 한탄했던가. 부모에게 순종해 농사로 평생을 산 대구 우록리의 몇몇 할머니는 자신들이 낟알 하나 더 거두는 확실성의 세계에 갇혀 세월을 흘려보낸 것을 원망했다.

타인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은 많다. 부모, 형제자매, 친척, 선생, 종교인……. 그들이 한마디 하고 싶다면 단언하지 말고, 상대의 사고를 너무 침범하지 않으며, 자기 경험을 과신하지 않고, 상대를 꿰뚫어본다는 식의 태도를 지양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타인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듯한 충격을 주거나 감정의 혼란, 고통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꿈을 향해 전력질주하기보다는 아이를 업고 달래는 여성이나 굽은 노인의 모습, 창밖 풀들을 음미하며 천천히 지나오길 바랄 것이다.

그런데 보통 조언의 바탕으로 삼는 어른들의 경험은 얼마나 믿을 만할까. 마사 누스바움은 『교만의 요새』에서 개인적인 서사와 다양한 세부 사항이 언제나 적절한 건 아님을 지적했다. 각자가 겪는 경험의 서사는 폭이 좁을뿐더러 담론을 위해서는 추상화·개념화·이론화가 필요하다. 이에 누스바움은 성폭행·성추행을 당한 여성/남성들의 경험과 감정을 넘어 전문적인 논의 속에서 법의 공평성을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도덕관념이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철학자는 경험이 “주관성의 비대함을 의미”하게 될까 봐 이를 경계했다. 경험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스승이지만, 때론 그것을 길에서 스쳐 가는 나무 정도로만 여겨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적 묘사로 사회를 풍경처럼 묘사한 캐슬린 스튜어트의 『투명한 힘』은 새로운 인식 도구를 제공한다. “어떤 사건이 펼쳐지기를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이 이 책의 기조이며, 저자는 ‘가치판단적 비평으로 성급하게 뛰어드는 일’을 되도록 늦춘다. 거기서 삶들은 새로운 번지수를 찾아 자리를 잡는다. 저자는 책 속에서 자신을 ‘여자’라는 보통명사로 부르는데, 즉 자기 정체성을 누그러뜨려 세상의 가능성을 응시하고 그것의 미래를 터주려는 의도에서다.

사실 훌륭한 작가들은 부드럽고 열린 미래를 곳곳에 뿌려놓는다, 그것도 기다리는 방식으로. 엘렌 식수는 아직 다 읽지 않고 방에 꽂아만 둔 책도 ‘나름의 읽기’라고 말한다. 책은 시간을 주고 기다리며 우리로부터 달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식수는 “안다고 믿는 우리, 계산하는 우리, 일종의 ‘수학 교수들’인 우리”보다는 천천히 기다리는 책의 선의에 전적으로 기댈 것을 권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계의 확장을 목격할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