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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표명한 나경원.. "당권 도전 말고 정치적 퇴로가 없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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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이 10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장관급)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6일 저출산 대책을 놓고 대통령실과 충돌을 시작한 지 나흘 만이다.

나 전 의원은 이날 “대통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렸으므로 사의를 표명합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보내 사의를 표명했고, 나 전 의원 측 인사도 이진복 정무수석에게 전화해 이같은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저출산고령사회위는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는 대통령 직속 기구로 부위원장은 비상근직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14일 나 전 의원을 3년 임기의 이 자리에 위촉했는데, 지난 5일 기자 간담회에서 언급한 ‘헝가리식 대출 탕감’ 저출산 대책을 놓고 대통령실과 갈등을 빚던 나 전 의원이 3개월 만에 사의를 표한 것이다.

2일 오후 국민의힘 대구시당에서 열린 2023년 국민의힘 대구·경북 신년교례회에서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오후 국민의힘 대구시당에서 열린 2023년 국민의힘 대구·경북 신년교례회에서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이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의를 표명하기까지 나 전 의원은 사실상 외통수에 몰린 상황이었다. 대출 탕감 아이디어가 보도된 다음날인 지난 6일 대통령실 안상훈 사회수석이 직접 나서 “정부 정책 기조와 전혀 반대되며, 사전에 논의된 적도 없는 정책”이라고 공개 반박했다. 이후 대통령실과 여권 핵심부는 “해촉”까지 거론하며 나 전 의원을 맹폭했다. 나 전 의원은 “진심이 왜곡돼 안타깝다”며 해명했지만, 공세 수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사의를 표하지 않고 시간을 더 끌 경우 윤 대통령과의 관계 회복이 어려워질 것”이란 관측까지 나왔다.

친윤계도 가세했다. 나 전 의원이 원내대표 때 원내대변인이었던 김정재 의원은 10일 “지금 출마하고 싶은 유혹은 순간의 지지율 때문에 그렇다. 신기루 같은 것”이라며 “잘 생각하시라”고 말했다. 검사 출신의 유상범 의원도 “나 전 의원이 2년 전 대표 선거에 나왔을 때와 상황이 다르다”며 “(당시) 참모들도 나 전 의원과 거리를 두고 있고, (의원들) 대부분이 이미 친윤으로 포섭돼 김기현 의원을 지지하고 있다”고 했다. 김기현 의원 측에선 나 전 의원을 “현역 의원이 1명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꼬집었다.

친윤계는 고강도 압박과 동시에 불출마를 설득하는 양동 작전을 폈다. '윤핵관'(윤석열 대통령 측 핵심 관계자) 이철규 의원은 지난 주말에 이어 이날 오전에도 서울 시내 호텔에서 나 전 의원을 만났다. 회동 뒤 나 전 의원은 출마 여부에 “고민 중”이라고만 했고, 이 의원은 “의미 있는 얘기는 없었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지난해 10월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나 전 의원의 사의 표명 소식이 알려진 직후 기자들과 만난 대통령실 관계자는 “저희 입장에선 ‘(사의 표명을) 들은 바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라며 “사의 표명에 대해서 저희가 아는 게 없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직을 내려놓을 땐 문자 메시지가 아닌 문서로 했어야 한다”고 지적하며 불쾌감을 내비쳤다. 이에 “윤 대통령이 사의를 반려하거나 보류시키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사의를 수용하면 전당대회 출마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대통령실이 제동을 걸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대통령실 참모는 “저출산 대책을 맡겼을 때는 여기에 총력을 다해달라는 것이 상식 아니겠느냐”며 “최근 대표 출마 가능성을 협상하듯 거론하는 나 전 의원의 행보는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나 전 의원이 부위원장 사의로 전당대회 레이스에 직접 뛰어드는 것 외엔 정치적 퇴로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나 전 의원은 이날도 “조금 더 고민해보려고 한다”며 말을 아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부위원장 자리야 어차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당권 도전은 다른 차원”이라며 “막판까지도 윤 대통령의 의중을 살피려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나 전 의원이 대표 경선에 출마하면 친윤계 후보가 아니라 비윤계 후보가 된다는 점은 나 전 의원의 고민이다. 한 친윤계 의원은 “현재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나 전 의원이 실제 비윤계 후보로 자리매김할 경우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당원 상당수가 지지를 철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대통령실·친윤계와의 공개 파열음 이후에도 여전히 당심 1위를 유지한다면 홀로서기에 힘이 더 실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나 전 의원 주변에서는 당장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하기보다는, 향후 행보와 관련한 숨 고르기식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나 전 의원은 이날 밤 기자들과 만나 전당대회 출마에 대해 “정치라는게 여러 상황이 많이 변하니 좀 더 고민하겠다”며 “우리 국민의힘과 대통령께 어떤 결정이 도움이 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표 수리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제가 대통령실로부터 공식 입장 받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사의 소식에 김기현 의원은 “충분한 숙고 끝에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할 것이라 믿고 있다”고 했고, 안철수 의원은 “아마 여러가지 사정이 있으신 걸로 생각한다. 아주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나 전 의원은 외교부 기후환경대사(장관급) 자리는 당분간 유지할 전망이다. 나 전 의원 측 관계자는 “추후에 내려놓을 수도 있지만, 한꺼번에 두 직책을 모두 내려놓으면 (대통령실에) 항명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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