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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용와대 정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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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정부의 공식 조직과 체계가 작동할 수 없게 만드는 ‘사설(私設) 정부’였다. 여야가 청와대 사수대와 대통령 공격조로 나뉘어 불모의 흥분 상태를 반복하는 ‘정치 없는 싸움’이었다.”

문재인 정부 2년 차 때인 2018년 정치학자 박상훈이 출간한 『청와대 정부』의 한 대목이다. 이 책에 나오는 ‘청와대 정부’는 대통령이 자신을 보좌하는 임의 조직인 청와대에 권력을 집중시켜 정부를 운영하는 자의적 통치 체제다. 저자는 “제어되지 않는 ‘강한 청와대’는 ‘민주적 책임 정부’와 양립할 수 없는 형용 모순”이라고 비판했다. 청와대 정부가 용산 대통령실을 칭하는 ‘용와대’ 정부로 바뀌었을 뿐,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상 조짐은 지난해 6월 주 52시간 개편을 둘러싸고 나타났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표한 개편안을 하루 뒤 윤석열 대통령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황당한 일이 터졌다. 대통령실과 부처 간의 소통 실수 정도로 여길 일이 아니다. 아마도 그 이후 각 부처에서는 대통령실 수시 보고와 대통령의 인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을 것이다. 장관을 중심으로 국정을 이끌겠다는 윤 대통령의 책임장관제 약속은 무색하게 됐다.

한 번은 실수라지만 반복되면 국정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배터리 등 국가전략기술과 함께 6%에서 8%로 올리겠다는 정부 안이 나온 건 지난해 7월 기획재정부가 세제개편안을 발표할 때다. 굵직한 정책이니 대통령실에 보고하고 사전 조율도 당연히 끝냈을 것이다. 세액공제율을 더 높이자는 여야를 기재부가 설득해 연말 법안이 통과됐다.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찔끔 올렸다는 여론의 비판에 기재부는 연구개발(R&D) 투자 세액공제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도 경쟁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보도설명 자료를 냈다. 지금도 그 자료가 기재부 홈페이지에 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호통 한 번에 기재부가 기존 입장을 뒤집었다. 졸지에 국가 차원의 전략 마인드도 없이 세수만 챙기는 시야 좁은 무능한 관료가 돼버렸다.

치열해진 글로벌 경쟁과 반도체 불황을 감안할 때 업계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5조원이 넘는 세수 감소를 초래할 세제 개편을 제대로 된 토론도 없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전광석화처럼 입장을 바꿔도 되는 건가. 적기(適期) 투자로 시간 싸움을 하는 반도체 회사 입장에서 세금 못지않게 중요한 게 공장 토지 확보와 전기·용수 같은 기반시설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토지를 구입하고 전기와 물을 끌어들이는 데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세금만 보지 말고 기업 환경을 같이 봐야 한다.

나경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의 ‘출산 연계 대출금 탕감’ 아이디어에 대통령실이 공개 반박한 장면도 볼썽사납다. 정부 위원회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대안이 검토될 수 있다. 언론도 ‘대출금 탕감’ 발표를 첫날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다음 날 대통령실 반박 이후 오히려 기사가 커졌다. 정부 입장과 다르고 수십조원이 들어가는 정책을 함부로 얘기했다는 게 비판의 요지인데, 단지 돈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추경에서 역대 최대인 23조원의 소상공인 손실보전금을 투입한 ‘손 큰 정부’ 아니던가. 나 전 의원의 여당 대표 출마 의지에 부정적인 ‘윤심(尹心)’이 작용했다는 게 중론이다.

대통령 의중만으로 여당을 좌지우지하고 말 한마디로 정부 정책을 뒤엎는 정부는 ‘용와대 정부’에 가깝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등 일부를 제외하고 장관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도, 관가의 복지부동이 여전한 것도 ‘용와대 정부’ 탓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초년생 윤 대통령의 자기 정치만 부각되고 ‘민주적 갈등 해결의 기제’인 본연의 정치는 없다는 지적도 들린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청와대 정부’의 가장 큰 폐해로 적극적 지지자와 반대자만 목소리를 낸다는 점을 들었다. 지금이 꼭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