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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영화 ‘꿈을 파는 사람’과 ‘밀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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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용서를 통해 가장 큰 득을 보는 건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용서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루한 차림새를 한 거리의 현자(賢者)가 소매치기 소년의 어깨를 감싸 쥔 채 피해자에게 호소한다. 브라질 영화 ‘꿈을 파는 사람’ (Vendedor de Sonhos, 2016) 중 한 장면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귀부인은 손주뻘 되는 그 소년에게 지폐 한 장을 쥐여주며 나지막이 속삭인다. “잘 살렴!” 너무 진부한가? 저명한 심리학자이기도 한 원작자 아우구스토 쿠리는 현대판 예수 링콜른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쉼 없이 고귀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새로울 게 없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인터넷에 떠도는 이 영화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모르는 것을 깨우치는 것 못지않게, 알면서 행하지 않는(못하는) 그 무엇을 일깨우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용서할 때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은?
용서는 내가 아닌 대상을 위한 것
용서할 때 얻는 평안과 행복은 덤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크게 득 본다”라는 자막을 보는 순간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밀양(密陽)’.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무려 8개의 여우주연상을 전도연에게 안긴 작품(2007)이다. 어린 아들 준이를 유괴범에게 잃은 신애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대로 들꽃 한 줌을 들고 그 ‘원수’를 찾아간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 살인마가 너무도 평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에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냐”는 물음에 “네,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라고 답한다. 마땅히 해야 할 ‘사죄’는 전혀 없이 자신이 가해자임을 잊은 듯 피해자에게 ‘위로’의 말까지 떠벌인다. “하나님한테 회개하고 용서받으니 내 마음이 이렇게 편합니다. 요새는 기도로 눈 뜨고 기도로 눈 감습니다. 준이 어머니를 위해서도 항상 기도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리할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어야 할 이 장면에서 감동한다면 기독교인? 아니다. 죄송하지만, 용서와 화해를 관념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감동은 불가능하지 싶다.

“어떻게 용서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이 벌써 용서받았대요, 하나님한테.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해요?” 용서의 주체가 누구인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가해자를 용서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정당한 항의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놓여있다.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용서하려 했더라면 그 비합리적인 ‘신의 사랑’에 동의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는, 덧붙여 그의 딸이 자기 머리를 손질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미장원을 뛰쳐나오는 행동은, 그녀가 용서하려 애쓴 것이 ‘원수’(용서의 대상)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음을 드러낸다.

이 두 편의 영화를 연결 지어 보며 용서에 대한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문다. 용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진정한 용서는 무엇인가? ‘꿈을 파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이 가장 큰 득을 본다고 했지만, ‘밀양’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신에게 용서받은 사람’이 누리는 평안을 고발한다. 피해자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둔 채 가해자를 용서한 신의 부당함을 탓한다. 그런데…. 그건 오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고 했다.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하고 가해자를 ‘멋대로(?)’ 용서하지는 않겠다, 즉 “너희가 서로 사죄하고 용서할 때 비로소 나 또한 너희를 용서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밀양’의 신애가 어렵사리 용서의 길을 나섰던 것도, 그녀의 원수가 누리는 ‘용서받은 자의 평안’도 다 허위다. 내게 죄지은 자, 즉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용서는 진실하지 못하기에 가식이고,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 없이 신으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공허한 자기기만이다. 그래서 진정한 사과와 용서는 내가 아니라 그 대상을 위한 것이라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얻는 내 안의 평안과 행복은 덤일 뿐이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